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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정동영 -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세월호의 상처와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해가 바뀌었어도 장사는 안 되고, 취직도 안 되고, 정치는 겉돌고, 약자는 기댈 곳이 없는 현실은 변함이 없다.

 

들려오는 소식들은 실망스런 것들뿐이다. 비정규직 종합대책은 궁극적으로 정규직을 <미생>'장그래'로 만드는 사실상 비정규직양산법이다. 정규직을 흔들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은 재벌과 대기업을 위해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희생시키겠다는 뜻이다.

 

대법원의 쌍용차 판결로 법의 보호막에서조차 버려지고, 의지할 곳도 없는 노동자들이 고공으로 올라 절규하고 있다. 다행히 광화문 광고탑에 올랐던 케이블방송 씨앤앰(C&M) 노동자들은 세밑 마지막 날에 땅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70m 굴뚝에 올라 24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 두 사람을 포함해 엄동설한에 찬바람 맞아가며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많다.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땅에서 더 호소할 곳이 없어 하늘로 올라가는 세상은 비인간적이다. 이런 비참함, 불안함은 850만이라는 비정규직 숫자가 말해주듯 대한민국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현실이고 미래다.

 

유럽에서는 정치의 80%가 노동 의제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여전히 노동을 소외시키고 있다. 정부 여당은 하층 배제적이고 상층 편향적이다. 1야당도 소수의 의식 있는 정치인 외에는 관성적으로 노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노동이 빠진 정치란 있을 수 없다.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은 대형마트가 아니다'는 황당한 판결이 영세자영업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재벌 대기업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골목상권과 재래시장이 속속 붕괴하고 있다. 납품단가 후려치기·기술 탈취 등 대기업의 수퍼 갑질로 중소기업은 생존에 허덕이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산업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정당과 정치인에게 표를 주고 국회로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정글 같은 시장에 모든 걸 맡겨놓지 말고 강자와 약자 간의 불균형을 바로잡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토대로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는 '11', 자본주의는 '11'를 핵심 원리로 삼는다. '11'의 자본주의 규칙은 어쩔 수 없이 불평등을 불러오게 되고, 눈물 흘리는 국민이 늘어나게 된다. 이를 완화하고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평등하게 '11'를 행사하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는 탓이 크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려면 좋은 정당들이 있어야 한다. 정당(Party)의 어원은 '부분'을 뜻하는 'Part'에서 왔다.

 

지금 여당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부분, 즉 재벌 대기업 사용자 관료집단 부유층 등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잘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에 들어가지 못 하는 대부분의 약자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제대로 대표하는 정당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정치와 정당에 대해 극심한 불신을 느끼게 돼 있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민주주의 제도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한해 야당의 줄 이은 실패는 국민에게 정치에 대한 냉소와 환멸을 불러왔다. 지난 연말 국회가 끝난 뒤 여당 대표는 이렇게 야당을 칭송했다. "야당 잘했다. 괜찮은 야당이다". 역대 야당 역사에서 여당으로부터 칭송받은 야당이 또 있는 지 과문이지만 이번이 처음 아닌가 싶다. 거기 더해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야당의 인식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여당에 참으로 괜찮은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특별법, 예산안, 담뱃값 인상, 공무원연금, 부동산 3, 자원외교 국정조사 등 모두 정부·여당의 방침대로 처리해 줬다.

 

세월호특별법 과정에서 1, 2, 3차 합의까지 청와대와 여당에 끌려다닌 것은 야당의 존재 이유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작년 말 새로운 정치세력 건설과 야당 교체를 촉구한 시민사회 각계 인사 '105인 선언'은 바로 세월호 타협 정국에서부터 태동했다.

 

담뱃값 2,000원 인상은 한 푼도 깎지 못하고 서민 증세에 동참했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강제성 없는국민대타협기구를 구성하는 조건으로 ‘4월 처리에 도장을 찍었다. 소위 사자방국정조사 중에서 4대강 사업은 빠지고 자원외교 국조를 성사시켰지만, 대상을 김대중 정부부터로 소급함으로써 하나 마나 한 게 돼 버렸다.

 

부동산 부자의 이해에 맞춰진 부동산 3법도 정부 안대로 통과시키는 데 동의했다. 국정조사·특검을 공언하던 비선 의혹은 국회 운영위 개최로 마감해 주었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헌재의 정당 해산 결정에 대해서는 종북 프레임에 포획되어 헌재 결정을 존중한다며 물러섰다. 야당에 남은 건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는 자기 위안뿐이다. 사실상 '야당 부재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길들여진 야당'으로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2015. 1. 5

 

정 동 영 (민주당 전 대통령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