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성적표를 받은 수험생을 위로하며]
지난주 전주 한일고에 갔다. 명목은 특강이었지만 수능 끝난 고3 학생들을 위로하러 갔다. 강당을 메운 고3들은 시험에서 해방된 홀가분한 표정이었으나 한편으론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기진맥진, 창백한 얼굴들이었다. 한 시간 강의 내내 꾸벅꾸벅 조는 친구들도 있었다. 몸속 깊숙이 내려앉은 피로감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으리라 싶어 안쓰러웠다. 학생들 대부분 불안한 눈치였다. 점수는 어떻게 나올지, 그 점수로 어느 대학 어떤 학과에 지원할 수 있을지 초조와 불안감이 교차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아이들을 녹초로 만드는 교육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까웠고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몇 년 전 독일 베를린의 한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을 참관했던 장면이 겹쳐 떠올랐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자유롭게 토론했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대학교 수업처럼 일주일에 36시간 자신의 선택에 따라 교실을 오가며 수업을 듣고 오후 3시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고3 학생들은 방과 후에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말에 선생님이 답변했다. "아이들에게도 인생이 있죠. 친구들과 기타를 치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죠. 아이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꿈 같은 이야기였다.
독일은 대학이 모두 국립이다. 등록금이 없다. 몇 년 전 일부 대학에서 등록금을 받기로 했다가 거센 반발로 철회했다. 너도나도 대학 진학을 수도 베를린으로 가려는 학생도 없다. 각자 자기 사는 지역의 대학에 간다. 중고등학교 교육의 목표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다. 경쟁은 어제의 나와 비교해 오늘의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지 친구와 경쟁하는 게 아니라는 독일 교사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대학 진학률은 우리의 절반가량인 40%쯤 된다. 대학을 안 나와도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하등 지장이 없다.
독일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에 붙잡혀 있지 않고, 부모들은 사교육비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독일 교육의 결과가 우리만 못한 것은 결코 아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은 우리 학생들이 독일의 두 배쯤 되겠지만, 막상 대학까지 마친 사람들의 경쟁력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다. 국민 소득은 우리의 두 배가 넘고 과학기술 수준은 세계 최고다. 노벨 과학상을 받은 숫자로만 봐도 독일은 87명으로 미국 다음이지만 우리는 한 명도 없다.
다른 것은 외국 것을 잘도 받아들이고 따라잡기도 하는데 왜 중고등학생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모는 교육제도는 고치지 못하는 것일까? 중고등학교를 입시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학생들이 꿈과 끼를 발산하며 자기 적성을 찾고 장래 직업을 무엇을 선택할지 탐색하는 기간으로 만들어 주는 일은 불가능할까?
문제가 있으면 해답을 내는 곳이 정치다. 그동안 정치가 제 역할을 못 했다는 이야기다. 얼마든지 해답은 찾을 수 있다.
대학교육을 유럽에서는 권리로 보고 미국에서는 상품으로 본다. 우리는 미국식인데 이걸 고쳐야 한다. 국공립 대학의 비중을 높이고 사립대학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 국가 책임을 강화해야 등록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다음 대학이 서열화 돼 있는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 지방 대학을 놓아두고 수도권으로 몰리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지역 거점 대학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독일처럼 자기 고향에서 대학을 가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2017년이 되면 대학 모집 인원은 57만 명인데 고교 졸업생은 55만 명으로 역전되는 사태가 생긴다. 서열 구조를 고치면 입시지옥 문제는 해결된다. 2007년 대선에서 나는 대학 입시 폐지와 국립교양대학 안을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인원과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 수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입시를 없애고 대신 대학 1~2학년 과정을 교양대학으로 설치해 각자 지역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 공부한 뒤 3학년 본과에 진입할 때 교양대학 성적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과도한 사교육비를 없애고 경쟁을 완화하자는 취지에서 설계된 개혁안이었다. 경쟁이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한 대학 입학 이후에 공부 경쟁을 하게 되면 초중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소모적 경쟁과는 다를것이라고 봤다.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요즘 들어 진보 진영 학자와 전문가들은 내가 제시한 국립교양대학 안이 가장 선진적인 교육혁신 안이라고 평가한다.
세계 최고인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은 자랑거리가 못 된다. 첫째 대학 나온 실업자도 세계 최고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오고도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실업자가 해마다 15만 명 이상이다. 둘째 대학 졸업하기까지 뒷바라지하느라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저소득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학벌 사회 유습을 하루아침에 다 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학을 나오든 안 나오든 하는 일에 귀천이 없고 보상체계가 지나치게 격차가 나지 않는다면 유럽국가들 경우처럼 누구나 힘들게 대학까지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 CEO들 연봉을 미국식을 따라서 수십 배 또는 수백 배까지 받도록 한 건 잘못이다. 최근 스위스에서 회사 최고경영자의 보수를 직원의 12배까지로 제한하는 입법을 논의하고 있다. 이런 걸 따라 배울 일이다.
'정동영의 말과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버스토리] 정동영 "北 장성택 실각설, 국정원의 여론몰이" (0) | 2013.12.15 |
---|---|
[대담] '10년 후 통일' 펴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0) | 2013.12.15 |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 “박근혜 정부 인사차별 너무 심하다” (0) | 2013.11.18 |
정동영 - "박 대통령 정상회담 언급은 진일보한 발언… (0) | 2013.11.04 |
민주당이 사는 길 (0) | 2013.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