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란 무엇인가?]
한국 정치는 '새'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당이 새정치 국민회의였고, 그다음이 새천년 민주당, 이번 통합신당의 이름도 새정치 민주연합이다. 여당도 새누리당이다. 정당들이 역사와 전통을 앞세우기보다 자꾸만 새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주권자인 국민이 기성 정치와 정당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OECD 국가 중 선거 때마다 의원의 절반가량이 물갈이되는 국가는 우리밖에 없다. 미국의 상하원은 현역의 재선 비율이 90%를 넘는다. 이렇게까지 계속 물갈이를 하는데도, 여전히 국민들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게 '새 정치'의 핵심 질문이어야 한다.
새 정치는 두 길로 가야 한다. 하나는 제도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먹고 사는 삶의 문제다.
제도 개혁의 핵심은 기득권을 타파하는 것이다. 민의가 정확하게 반영되는 정치 시스템으로 혁신하는 것이다. 지금의 제도 아래서 최대 수혜자는 양대 정당이다. 새누리당이 19대 총선에서 42%의 지지를 얻었는데, 득표율로 따져 300석 의석 중 126석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152석을 가져갔다. 과다 대표돼 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총선에서 얻은 36%의 정당 득표율대로 계산하면 108석이 돼야하지만 실제로는 127석을 차지했다. 양당제에 대한 국민들의 만족감이 높다면 정당성이라도 확보되지만, 그것도 아니다. 정치 불신과 탈정치 현상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온 것이 새 정치 현상이다. 정치의 판을 바꾸라는 것인데, 결국 유권자의 의사가 한 표 한 표 모두 국회에 대표되는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10년 전 열린우리당 때 상향식 공천과 돈 선거 근절이 정치 개혁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민의와 동떨어진 정치 시스템 개혁이 새 정치의 핵심이라고 본다. 총선에서 1위 대표제라고 부르는 승자 독식 주의를 깨야 한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50대 50 비례대표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회의원 300명을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 각각 150명씩 반반으로 나누어 각 정당은 득표율만큼만 의석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만약 생태주의 정당이 나와 5% 득표를 얻으면 국회에서 15개의 의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국민 100명 중 5명이 생태주의 정당에 한 표를 던졌다면, 그런 의사를 가진 5명의 목소리가 국회에 반영될 수 있고 국가 운영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인 19대 국회에서 이 제도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다가올 2016년 20대 총선에서, 신당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정치 개혁 약속으로 제시해야 한다.
새 정치의 두 번 째 과제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신당은 오른쪽이나 왼쪽이 아닌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 말은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 실현으로 표현된다.
사실 경제민주화와 보편 복지라는 시대적 화두를 선도한 것은 민주당이었는데, 대선에서 확실히 깃발을 든 것은 박근혜 후보였다. 그걸 다시 신당의 정체성으로 삼으려면, 분명한 원칙에 따라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 사회가 IMF 위기 전에는 소득 분포를 그림으로 그리면 봉우리가 하나인 사회였다. 맨 왼쪽의 빈곤층부터 가장 오른쪽의 부유층까지, 거꾸로 된 U자 형태였다. 봉우리의 꼭지점이 중산층으로 당시 국민의 75%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봉우리가 하나인 '단봉(單峰) 사회'에서는 민주당은 오른쪽으로, 새누리당은 왼쪽으로 봉우리의 중간을 향해 움직이는 게 맞다.
그러나 IMF 이후 17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양극화 사회로 변했다. 최근 통계청 자료를 보면, 국민의 47%가 자신을 하류층이라고 응답했다. 충격적이다. 양극화 사회를 그림으로 그리면 봉우리가 두 개인 '쌍봉(雙峰) 사회' 그것도 왼쪽 봉우리가 크고 오른쪽 봉우리가 작은 낙타 봉우리 같은 사회다.
이런 상황에서 오른쪽 봉우리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새누리당은 왼쪽으로 이동하는 게 맞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깃발을 든 것 아닌가.
대선 승부에서 핵심은 왼쪽 봉우리 저소득층에서 거의 6대4로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압도했다는 점이다. 그게 야당 패배의 결정타였다. 850만 비정규직, 600만 자영업자, 300만 농민, 200만 청년실업자들이 6대4의 비중으로 새누리당 후보를 뽑아준 것이다.
그렇다면 신당이 새누리당이 포진해 있는 오른쪽으로 가야 하나? 그렇게 되면 집권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쌍용자동차나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재능교육 등 노동자들의 싸움 현장에 항상 민주당은 빠져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 국민이 아닌가? 신당에게 그들의 표는 필요가 없나? 가만있어도 그들의 표는 100% 야권에 오나? 아니다. 6대4로 이미 왼쪽 봉우리를 빼앗기지 않았나.
다시 왼쪽 봉우리를 대표하려면 그들이 사는 삶의 바닥으로 내려가야 하고, 노동 의제가 신당의 주요한 전선이 되어야 한다. 2017년에 정권이 바뀌면 IMF가 불러온 정리해고 시대, 비정규직 시대를 끝내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정리해고를 엄격하게 제한하겠다는 게 왼쪽인가? 그건 왼쪽 오른쪽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민주화의 쉬운 표현인 '대기업 빵집 횡포로부터 골목 빵집을 지켜드리겠습니다'는 약속이 신당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좌우 논쟁이 아니라 아래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새 정치라고 생각한다.
2014년 3월 23일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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