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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 칼럼

평화체제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표충사에서- 임금님도 도망치고 그리고 관리들도 모두 백성을 팽개치고 줄행랑을 쳤을 때 서산대사님, 사명대사님, 기허대사님께서 떨쳐 일어나셔서 나라를 구하셨습니다.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글도 후손들의 삶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표충사에 와서 애국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정치가와 외교관이라면 반드시 표충사에 와서 참배하고 그 직을 시작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대해서는 온 국민이 추모하고 그 호국정신을 이어받은데 부족함이 없습니다만 이 3분 선사님의 정신을 후손들이 이어받는 것은 미흡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사명대사님께서는 군사의 최고지도자이셨을 뿐 아니라 외교의 대가이셨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도탄과 어지러움에 빠진 당시 민생.. 더보기
태산도 국민이 합의하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태 전 돌아가신 어머님이 떠오릅니다.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남은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1974년이었습니다. 성동구 사근동의 판자촌집에 들여온 재봉틀이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저와 동생들은 새벽마다 어머니가 밤새 기운 아동복 바지를 보따리에 메고 평화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장남이자 가장이던 제가 민청학련 사건에 이어 강제징집으로 3년간 떠나 있던 사이, 어머님과 동생들은 재봉틀과 함께 삶을 버텨야 했습니다. 저도 대학 복학 전 1년간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어머님과 봉제 일에 매달렸습니다. 다들 어려웠던 70년대였지만, 지금 제가 그런 상황이라면, 그때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