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의 공식 임기 만료일은 5월29일이다. 이즈음 국회를 영화로 친다면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숨가빴던 영화는 끝나고, 이제는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의 이름이 줄지어 올라가는 먹먹한 시간이다. 의원실 곳곳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동안, 물밑에서는 ‘시즌 19(19대 국회)’를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18대 국회의 지난 4년을 영화 장르로 구분한다면 ‘액션 활극’ 정도로 부를 수 있을까. 한 의원은 “몸싸움·날치기·직권상정 따위로 국민들에게 기억된 지난 4년이었다”라며 면구스러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곱씹어볼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 4년간 ‘시즌 18’의 출연 배우 299명 중 활약이 돋보인 사람은 누구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19에 발탁되지 못한 배우는 누구였는지. 여기 소개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더 이상 19대 국회의 주연이 아니라는 것. 개중에는 선거라는 대국민 오디션에 참여하지 않은 이도, 참여했으되 낙선의 고배를 마신 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다음 행보 역시 주목할 일이다. ‘시즌 19’의 카메오 혹은 신스틸러(주연 못지않은 명연기를 펼치는 조연)로 존재감을 과시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니까. 


 

 

ⓒ시사IN 조남진

18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를 앞둔 5월8일 김진애 의원 사무실 직원들이 짐을 싸고 있다.





 

 

 

 

 

 

 

 

 

 

 

■ 김진애, 18대 국회의 ‘미친 존재감’

 

 

서울 마포갑 당내 경선에서 탈락한 건 김진애 민주당 의원이었지만, 정작 몸살을 앓은 건 그가 아니었다. 민주당 공천 파행 소식이 들릴 때마다 유권자들은 김 의원의 이름을 호명하며 당을 압박했다. 한발 더 나아간 사람도 많았다. 정작 본인은 손사래를 치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차기 정부의 국토부 장관으로, 김문수 경기도지사 대선 출마시 재·보궐 선거를 치러야 할 도지사 후보로, 심지어는 당 대표로 나서라고 호출하곤 했다. 본선 무대에는 오르지도 못했건만,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후보자로 김진애를 꼽는 것이 무색하지 않은 이유다.

민주당 비례대표 17번이었던 김 의원은 2009년 11월 국회에 입성했다. 주가조작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정국교 전 의원의 자리를 승계받았다. 고작 2년 남짓 의정 활동을 했지만, ‘4대강 저격수’로서 보인 존재감은 때때로 298명을 압도하곤 했다. 탈법적 턴키(설계·시공 일괄 입찰) 발주 문제, 폐기물 불법 매립과 준설토 처리 문제, 농경지 침수 피해 등 4대강 사업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이 그의 발에서, 입에서 시작됐다. 또 그가 주도적으로 발의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과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은 결과적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뉴타운 문제의 출구전략을 짜는 데 도움이 되었다.

김 의원은 떠나면서 19대 국회에 숙제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국토위는 각종 지역 예산을 딸 수 있는 이른바 ‘물 좋은’ 위원회다. 그러나 국토부가 ‘대통령 사업부’가 되면서 국토위도 뜨거운 논쟁의 장이 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각종 부동산 완화·4대강 사업 등에 대해 야당은 국토위에 ‘야성’이 강한 개혁 의원들을 투입해야 한다. 달걀로라도 바위를 계속 쳐야 한다.”

그는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로서, 또 전직 국회의원으로서 ‘고언’을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지난 5월7일부터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7회에 걸쳐 ‘국토위를 개혁하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고 있다. 김 의원이 지난해 11월 펴낸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은 요즘 들어 더 잘 팔린다. 당분간은 ‘저술가’로서 집중할 계획이다. ‘민주당원’으로서 김진애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아직 계획된 바는 없다. 그러나 김 의원은 “대선을 앞두고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라고 말했다. 지난 4·11 총선에서는 선대위 홍보본부장을 맡았다.



■ 이정현·김부겸, 의미 있는 패배자들

 

 

4·11 총선을 사나흘 앞두고 광주의 한 인사로부터 “광주 사람들이 큰일을 낼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민주당 텃밭에서 새누리당을 선택할 거라는 의미였다. 뿌리 깊은 지역 구도를 깨는 신호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들의 기대를 비껴갔다. “장렬하게 전사하고 돌아왔습니다. 하하하.” 수화기 너머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왼쪽 사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 의원은 새누리당의 불모지인 광주 서구을에 출마해 오병윤 통합진보당 당선자에게 12% 포인트 차이로 졌다. 의미 있는 패배였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그는 11만명 서구을 유권자에게 720표를 얻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번에는 무려 4배 이상인 2만8314표를 얻었다. 그는 그 숫자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그는 낙선 때문에 울지 않았다. 광주에 이 의원이 내걸었던 플래카드 문구는 ‘저 이정현, 광주 시민의 성원에 웁니다’였다. ‘정치를 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그는 “광주에 뼈를 묻겠다”라고 말했다.

총선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말대로 ‘지구상에 없는 직책’으로 돌아왔다. 바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대변인 격’이라는 직책이다. 12월까지는 박 위원장을 위해 헌신할 생각이다. 이 의원이 생각하는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 박 위원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대구에서는 김부겸 민주당 의원(왼쪽 사진)의 발걸음이 재다. 그 역시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에게 12% 포인트 차이로 졌다. 새누리당의 텃밭인 지역이지만 김부겸이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까닭에 3선 이한구 의원은 선 거 기간 중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지역을 찾았다. ‘김부겸 덕분에 지난 8년보다 지난 한 달 동안 이한구 후보를 본 적이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지역에 돌기도 했다.

“안 될 거 뻔히 알면서 죽으려고 내려왔느냐”라고 마뜩잖아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선거운동 기간 중 만난 유권자의 사인 공세에 시달리는 웃지 못할 일도 경험했다. 민주당 최고위원을 맡았고 경기 군포에서 3선이나 한 중진 현역 의원은 이렇게 대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김 의원은 “성원해준 사람들이 있는데, 나를 지지해준 대구 시민한테 배신감을 주면 안 된다. 여기 지켜야지. 이제 나한테 서울은 어쩌다 가는 곳이다(웃음)”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받아든 성적표는 한국 사회에 여전히 강고한 지역주의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언제나 선거 결과가 너무 뻔해서 ‘펀(Fun)’하지 않았던 이 두 사람의 지역구, 다음 총선에서는 달걀이 바위를 깨는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 김성식, 후원하고 싶은 금배지 1위


 

 

4·11 총선 기간에 김성식 무소속 의원은 언론 노출을 최대한 자제했다. 상대 후보들의 ‘위장 무소속 후보’라는 비판이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12월 새누리당에 불던 쇄신 바람 속에서 ‘신당 수준의 재창당’을 요구하다 탈당한 대표적인 쇄신파다.

새누리당은 배려 차원에서 김 의원이 출마한 서울 관악갑 지역에 공천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수도권에 강하게 분 MB 심판론’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이 지역 민심이었다. 그런데도 김 의원이 무소속으로 거둔 득표율은 41.6%. 패배했지만 저력이 돋보였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초선인 김 의원은 여야를 넘어 ‘차세대 유망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국회 출입 기자들이 뽑는 최우수 의원상(백봉상)을 3년 연속 받기도 했다. <시사IN>이 2009년 국회의원 299명을 대상으로 한 ‘국회의원이 후원하고 싶은 금배지는?’라는 조사(<시사IN> 제118호 커버스토리 참조)에서는 여야의 고른 지지를 받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국감 때면 상임위 재정위원회 소속이던 그의 매서운 질문 앞에 정부 부처 사람들은 쩔쩔매기 일쑤였다.

보통은 재선·3선급 의원이 맡는 정책위 부위원장을 김 의원이 맡았을 때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원외이던 2003년, 당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제2정책조정위원장을 지낸 공인된 정책통이었다. ‘당론 반대 자판기’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당내 비주류였지만, 새누리당의 당론을 만드는 최일선에 그가 있었다. 기여입학제 반대, 추가 감세 철회, 등록금 부담 완화정책 등 정부·여당의 정책 기조와 정면충돌하는 의견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여당 내 야당이었던 셈이다.

김 의원은 선거가 끝난 후 휴식기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못 읽은 책도 읽고 미처 챙기지 못했던 일들도 돌아보는 중이다. SNS를 통해 지지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은 있다.’ 그가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마친 5월2일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인용한 시구이다. 새누리당 안팎에서는 그의 복당 여론이 활발하다. 그의 다음 선택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 박선숙, ‘선당후사’ 양보와 배려의 아이콘

 

 

‘칼질’의 장본인이 출마할 수는 없다고 했다. 민주당-통합진보당 간 야권연대 실무 협상 대표자였던 박선숙 민주당 의원은 4·11 총선 불출마를 택했다. 공천 과정에서 누군가는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과 무소속 출마가 이어졌으며, 기자들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의원이 속출하는 와중이었다. “연대가 성사돼 다수의 민주당 동지들이 지역구를 내놔야 하는 상황에서 도의적으로 출마할 수 없었다”라는 게 박 의원의 불출마 이유였다. 비례대표 초선인 그를 두고 ‘쉬운 지역구’를 받으려 한다는 뒷말도 무성했지만 불출마 선언으로 그런 비판은 자취를 감췄다.

그런 박 의원에게 총선 국면에서 더 큰 임무가 주어졌다. ‘비리 연루자’ 공천 파문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임종석 사무총장 후임으로 임명됐고, 선거 전략을 총괄 지휘하게 되었다. 박 의원은 민주당의 구원투수로 불렸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대개가 낙관했지만, 쉬운 선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균형은 맞췄지만, 여론이 원했던 변화는 이루지 못한 선거다. 새누리당 박근혜 위원장은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대선은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거다. 대선 국면에서 할 일이 주어진다면 온몸을 던져야지(웃음).”

박 의원은 국회 입성 전에 첫 여성 청와대 대변인이었고(국민의 정부), 환경부 차관을 거쳤다. 비례 초선임에도 초선답지 않은 강단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의원은 18대 국회를 ‘최악의 몸싸움 국회, 난장판 국회’라고 정의하면서도, ‘보이스피싱 피해보전금 지급에 관한 특별법안’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 법률안’을 입법화한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대개가 짐을 싸느라 분주한 의원회관에서도 박 의원실은 유독 느긋한 분위기다. 저축은행 비리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서 임기 마지막 날까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 정동영, “현장과 국회의 가교 되겠다”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상임위원장 하고 싶어하셨는데….” 정동영 의원실 보좌관이 쓴 입맛을 다셨다. 지역구 예산을 딸 수도 없고, 빛나는 일을 하기도 힘든 환노위는 국회의원 사이에서 인기 없는 상임위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이 19대 국회에 입성했다면 환노위 위원장을 자원했을 게 분명하다. 총선에서 패했지만 휴식은 짧았다. 정 상임고문은 총선 이틀 뒤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한일병원 농성장, 쌍용차 분향소, 광우병 쇠고기 반대 시위 등 이른바 ‘현장’이 지역구였다.

2007년 대선 패배, 그 뒤 정 상임고문은 ‘민주당이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전북 전주 덕진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2009년 18대 국회에 입성했다. 따가운 시선들이 그를 쫓았다. 그런 그가 18대 국회 들어 처음 찾은 현장은 용산 참사가 벌어진 남일당이었다. 유족들과 밥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신부님이 말했다. “저기 정동영 의원 보이지요? 저 사람이 대선에서 이겼으면 여러분들 여기 있지 않아도 됐습니다.” 이것이 ‘큰 그림’을 그리던 정 상임고문의 발걸음을 현장으로 돌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진정성을 두고 쑥덕거렸다. 같은 당 의원이 “아, ‘민주노동당’의 정동영 의원요?”라고 대놓고 비꼬는 일도 있었다. 현장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정 상임고문은 개의치 않고 자리를 지켰다. 현장의 문제를 국회로 가져오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사태 때는 해외에 있던 조남호 한진 회장을 국회로 불러들여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열었다. 그 결과 18대 국회 내내 정 상임고문의 의원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이들은 아니었다. 의원실을 찾는 이들의 옷에는 ‘투쟁’ 따위 단어들이 새겨져 있곤 했다.

정 상임고문은 야권의 잠재적 대권주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총선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면서 그의 고민도 깊어졌다. 총선 패배 후인 4월19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시민들과 대화 자리를 가진 정 상임고문은 “원내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현장과 국회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노선’ 없이는 대선도 없다”라는 말로 ‘MB 정부 심판’만 부르짖고 심판의 내용이 없었던 민주당에 날을 세우는 모습도 보였다. 의원실 관계자는 “정권 교체에 대한 의지가 있으니, 대선에서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하리라 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