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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s team/Today's DY Issue

멘붕이 끝난 자리에 희망이 온다

[전북의 창] 멘붕이 끝난 자리에 희망이 온다

2012.12.27  정동영/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미국 뉴욕타임즈 신문에 '멘붕'(men-boong)이란 낱말이 등장했다. 대선 결과 한국의 젊은세대들이 정신적 공황상태(mental collapse)에 빠졌으며 이를 '멘붕'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재벌'(Chae-bol)이란 말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오른데 이어 '멘붕' 이란 말도 곧 사전에 올라갈 지 모르겠다.

'멘붕'이란 말은 젊은 세대 뿐만이 아니라 야당 후보에게 압도적 표를 던진 호남 유권자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호남 유권자들이 야당 후보를 선택한 것은 지역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의 회복 그리고 차별과 소외가 없는 공정한 사회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내가 출마했던 5년 전 대선에 비하면 이번 선거는 이길 확률이 큰 대선이었다는 점이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 같다. 지난 5년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심판이란 관점에서 보면 질래야 질 수 없는 선거이기도 했다. 더구나 지난 4.11총선에서 국민은 거대여당을 엄정하게 심판하고자 했으나 야당의 자충수로 여당에게 과반수 승리를 헌상한 과오가 뼈아픈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고 보는것이 옳다.

그 점에서 민주당은 깊은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무엇보다 '의제' 없는 선거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 때 학생들의 도시락 무상급식 의제가 선거 판을 휩쓸었던 것을 상기해 보면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은 의제 실종 선거였던 셈이다.

대선의 핵심 쟁점이었던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 화두 모두 야권이 앞장섰던 잇슈 였음에도 여당 후보 쪽의 상대방 잇슈 선점 전략에 휘말려 물타기가 돼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여당 전략의 승리라고 말하기에는 야당의 무능력과 전략실패가 아픈 부분이다.

이처럼 야당은 제 역할을 못했지만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은 지난 60여년동안 분단보수 세력이 만들어온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펼친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승리의 턱 밑까지 추격한 것은 의미있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여성들의 높은 지지(55:43)와 저소득 서민층의 표로 승리했다. 반면 한국 선거에서 여성들과 저소득 서민층은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여당 후보에게 높은 지지를 보냈다. 양국 서민층의 이러한 지지투표 역전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수 여성과 저소득층은 모두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 속한다. 한국과 미국의 민주당은 둘 다 노선과 정책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정당 보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조건은 같은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1차적으로는 민주당이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유권자들에게 부각 시키는데 실패했음에 원인이 있다.

지난 수년간 국민들에게 어느 정당이 서민을 가장 잘 대변하는 당인가 라고 묻는 조사에서 민주당은 놀랍게도 3등에 머물렀다. 1등은 진보 정당, 2등은 새누리당 그 아래 민주당이 있어 왔다. 이것을 두고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 서민층의 자기 이해관계에 반하는 투표 배경에는 구부러진 언론의 존재가 있다. 이른바 기득권 동맹의 일원으로 집권세력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보수 신문들과 권력에 장악된 방송들이 쏟아내는 왜곡된 정보의 흙탕물 속에서 서민대중의 분별력이 무뎌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권력과 언론 합작으로 정치 혐오를 부추겨 '그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다 똑같다'는 정치적 냉소를 불러 일으키는데 성공한 것도 서민층의 계층배반 투표가 나타나게 된 배경일 것이다.

이런 언론환경 속에서도 희망의 징조는 있다. 해직언론인들이 만든 팟 캐스트 방송 '뉴스타파'를 대안방송으로 키우자며 지난 며칠 사이 2만 여명의 시민이 매달 1만원 씩을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시사주간지 '시사IN'의 독자가 4천 명이 늘어나는 등 공정한 대안언론을 요구하는 다양한 행동이 분출하고 있다. 정론에 목마른 대중들의 작지만 의미있는 행동들이다.

호남의 상실감은 깊고 넓다. 상실감의 뿌리에는 차별과 소외의 재연 가능성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김수영 시인의 싯귀 처럼 풀잎은 바람 앞에 빨리 눕지만 풀잎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밀고온 호남정신은 풀잎처럼 벌써 가슴 속에서 일어서고 있다고 믿는다. 멘붕이 끝난 자리에 희망이 온다. /민주통합당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