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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평화공원보다 개성공단이 먼저"

전북인권선교회 주최 강연

           - 일시 : 2013년 5월 10일 (금) 오전 10시 30분

           - 장소 : 전주성광교회

           - 주제 : 개성공단 재가동과 9.19 복원은 우리의 몫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방미 중에 언급한 비무장지대 '평화공원'은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전에 개성공단이 먼저 돌아가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북한 땅에는 한국 국적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전화선 철도 등 모든 연결선도 끊어졌다"며 "이는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무너졌다는 방증이다"

 

"개성공단과 북핵문제는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2005년 9·19 때 북한은 처음으로 북핵 포기를 선언했다"며 "이때가 바로 개성공단이 논의되고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민족 협력을 통해 '먹거리'를 보장받았다고 생각한 시기"

 

"개성공단은 단순히 경제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총부리를 겨눴던 상대가 함께 물건을 생산하는 민족 화합의 상징이다"면서 "이렇듯 개성공단이 멈춘 상태에서는 북핵은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

 

 "이명박 정부 5년간 '선(先)비핵화정책'만 주창하며 북한과 소통이 없이 지냈다. 오바마 정부 역시 북한을 무시하고 방치하던 이 시기에 북한은 핵 기술력을 빠른 속도로 성장시켜 오늘날의 북핵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남북이 관리돼야 하고, 남북이 소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발언권이 실리는 것"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오면서 푸른 들녘을 바라보면서 문득 옛날 우리 선조들 생각이 났습니다. 120년 전에 전주성을 함락했던 동학농민들은 이 세상에 억압받는 사람이 없는 차별이 없는 사민평등의 세상 외세에 짓밟히는 조선 방패, 자주 독립, 그리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 인내천의 기치를 이 전주성에 내 걸었습니다. 어언 120년 증조부, 고조부 생전이셨던 거 같은데요. 1894년 4월, 120년이 지난 오늘 우리 후손들은 그때 저희 선조들이 꿈꿔왔던 차별이 없고 작고 미약한 사람도 다 사람으로 권리를 누리는 그런 꿈, 또 조선 반도가 자주적이고 독립된 권한의 나라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못내 한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청년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참 위대했던 인간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느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분단되고 분단되었던 속에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는데 흐름을 바꿔 놓은데 유일한 인물이 김대중 철학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최근의 현안 개성공단과 9.19 라는 것도 바로 분단을 넘고자 하는, 우리 국민이 또 그분에게 국민의 정부 이어서 10년 민주정부를 허락했기 때문에 대결과 대립의 역사를 환호와 협력의 역사로 10년 바꿔 봤어요. 70년 역사에서 10년 동안 우리는 증오의 시대가 아니라 용서와 포용의 시대 10년을 경험했습니다. 그 상징이 개성공단이요, 9.19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다 지금 풍전등화에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비무장지대 평화공원을 만들겠다, 좋은 생각이다 했습니다. 비무장지대 지뢰밭과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155마일, 250km 넓이 4km의 비무장지대가 평화공원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의 염원인 평화공원 아이디어는 오래 됐습니다. 한 가지 좀 서운한 게 빠져있는 게, 평화공원이 되려면 먼저 개성공단을 다시 돌리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이게 돌아가야 평화공원이고 뭐고 가는 거지 10년 가까이나 돌아갔던 개성공단이 날라가 버릴 폐허 위에 평화공원 구상이라는 것은 공허한거든요.

 

사실 정상회담의 귀추를 뚫어지라고 쳐다봤습니다만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거에요. 한미동맹을 강화해서 북한의 도발을 강력히 대처하겠다, 억제하겠다 하는 한 맥락이 있고 또 하나는 그러나 대화의 문은 열어 두겠다 이렇게 말했는데 여기에 하나 빠져있는 게 보다 선제적으로 구체적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제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미국과 협의를 해낸 내용이 없어서, 왜냐면 한미정상회담이라는 것은 앞으로 5년 동안 2013년에서 2017년까지 한국, 미국의 대북정책의 뼈대를 그리는 그런 과정이기 때문에 중요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부가 들어와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프로세스는 과정이라는 말일 테니까 한반도 신뢰과정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말은 신뢰라는 말입니다. 신뢰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그건 정말 한반도 남북 상황에서 제일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왜냐면 신뢰가 무너져 있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애를 써서 땀 흘려서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공단을 만들고 관광을 하고 철도를 잇고 사람이 왔다갔다하고 1년에 십만 명이상 이게 다 신뢰의 표시이거든요. 그런데 2013년 5월 10일 오늘, 현재 대한민국 주민등록을 가진 국민은 단 한명도 이북 땅에 체류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을 잇는 어떤 통신선, 전화선도 이어져 있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물건도 남과 북이 사고파는 흥정이 끊어져 있습니다. 일체의 교류, 일체의 왕래, 일체의 체류, 완벽한 소통 단절의 순간이 2013년 5월 10일입니다. 지금 이순간이 그렇습니다. 지난 4월말부터 그렇게 됐고요. 이것은 40년 전에나 있었던 상황이에요. 그리고 아무리 남북이 적대하고 미워하는 시대에도 적십자 선은 살아있었고 물건은 사고팔았어요. 일체 다 끝났습니다. 어떻게 절벽의 시대로 끌고 갈 수 있는지. 긍정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연단이 끝나지 않았다, 더 단련을 시키고 더 크게 쓰기 위해서 우리 민족에게 시련을 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박대통령도 이야기한 한반도에서 신뢰를 만들어보고자 한다하는 본인의 구상이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개성공단 문제는 이번에 우리 국민 중에 지역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강연을 합니다만, 열에 아홉명은 큰 공업단지가 이북 땅에 있었더냐 라고, 처음 알았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남북긴장상황 속에서 개성공단의 가치가 새삼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역설도 있긴 합니다. 세 가지 가치가 있죠. 하나는 경제력 가치, 군사적 가치, 미래적 가치입니다. 경제력이란 금방 말씀처럼 백 개가 넘는 123개의 공단인데요. 삼십만평의 거기에서 옷도 생산하고 구두도 만들고 자동차 부품도 만들고 화장품 그릇도 만들고 그런 것들을 하는데 거기에 오만명이 넘는 오만삼천명의 북한 노동자가 일하고 남쪽에는 거기에 물건을 1차, 2차 원단, 원자재, 부자재 이런 것을 대는 하청업체가 약 육천개 업체가 그런 경제적 측면이 있고, 군사적으로는 거기가 북한 땅이잖아요. 북한 땅인데 북한 땅을 남쪽 기업들에게 내 주었는데 북한에게는 군사적으로는 굉장히 예민한 지역입니다. 이 사업을 처음 추진한 것은 민간이었습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났을 때 처음에 현대는 해주를 희망했어요. 해주는 북한의 해군 사령부가 있어서 허락할 수가 없고 개성이 어떠냐고 개성을 제안했어요, 김정일 위원장이. 그때 정주영 회장이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왜 깜짝 놀랐냐. 자기는 민간 경제인 신분이지만 개성, 그러면 휴전선도 있고 군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지역인데 개성을 내준다? 그럴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몇 달 뒤에 그림 설계도를 만들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경상남도 창원을 모델로 해서 1차, 2차, 3차 3단계에 거쳐서 1차 백만평, 2차 이백만평, 3차 오백만평, 총 팔백만평에 공장을 집어넣고 처음에는 섬유공제라든지 임가공,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집어넣었지만 나중에는 기술집약적인 반도체라든지 자동차공장이라든지 이런 것도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공단이 되는데 이 공단은 중국이나 베트남의 어떤 공단보다도 더 첨단의 세계적인 모델 공단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했죠. 거기에 대해서 김정일 북한 지도자는 굉장히 감동을 받은 거예요. 세계적인 공단이 개성에 들어선다, 그리고 이제 공단이 시작돼서 몇 년 지난 뒤에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김정일 위원장이 이렇게 퍼 붓습니다. 세계적인 공단을 만든다고 했는데 이게 뭡니까? 세계적인 공단을 만든다고 했는데 이천만평 공단을 만든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삼심만평이라고 하면 이천만평 중에서 1/60이에요. 이천만평 중에서 삼심만평이라고 한다면 1/60이에요. 그러니까 2% 정도 되는 거죠. 백으로 치면 2%. 그 당시엔 김정일 위원장 머리엔 뭐가 있었느냐 하면 정주영 회장이 이렇게 말했어요. 인구 50만 규모의 공업도시가 개성에 건설되려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만 삼십오만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개성시나 장풍군이나 개풍군이나 인구를 다 합쳐도 인구가 삼십만도 안 되는 거에요. 공장에 들어 갈 사람이 부족하잖아요. 노동력 부족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김 위원장이 했던 대답이 잠시 멈칫 하더니 이거 몇 년 걸립니까? 설계에서 완공까지. 8년 정도 잡으면 됩니다. 8년 걸린다고요? 그렇다면 2000년 정상회담 직후입니다. 8년이면 6.15 남북합의도 했고 8년이면 남북 관계도 많이 발전할 것이고 현재 남과 북의 군대 숫자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 단계가 되면 북한 인민군 군대 삼십만명의 옷을 벗겨서 군복을 벗겨서 공장에 집어넣겠소. 이게 김 위원장의 답변이었습니다. 그 현실화 여부는 차치하고 북한 최고 지도자의 머릿속에 그런 발상이 들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청년 김대중의 4대국 보장론으로부터 3단계 통일론으로까지 쭉 우리민족을 증오와 적대로부터 용서와 화해로 이끌면서 꿈꿨던 서로 총을 겨누던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그래서 개성에 건설된 공장이 세계 첨단의 공단 실제 이천만평 중에 삼십만평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천만평 그대로 완성이 되면 북한 경제 전체의 5배에 달합니다. 그 규모가 북한 경제 전체의 5배 규모나 됩니다. 북한 경제 자체보다도 한배, 두배가 아니라 현재도 북한 덩치가 커요. 착시가 아니라 언론에서 얘기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작년에 삼십만평에서 생산한 물자들이 오천억원어치 생산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오천억원, 별거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무슨 오천억원이냐하면 개성공단은 남쪽에서 원자제, 부자제, 양복으로 치면 원단, 단추, 실 다 가져가잖아요. 가져가서 거기서 가공을 해서 만들어 오는데 가령 이 양복이 원단까지 합치면 오십만원인데 개성에 만든 양복은 오십만원이 오만원쯤으로 계산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건비, 전기료, 관리비, 토지사용료, 감각삼각비 이런 것만 넣어서 오천억이라는 것이죠. 실제는 사실 10배를 곱해야 정확하다고 합니다. 개성공단 사이즈가 작년에 오조원 생산했는데 북한 경제 전체가 작년에 20조원 규모입니다. 한국은행 통계로 이백억불. 일 년에 이백억불 경제인데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것이 50억불쯤 되니까 북한이 덩치가 큰 거에요. 자기들한테 떨어지는 건 임금밖에 없죠. 인건비 밖에 없고 토지사용료 밖에 없지만 북한 경제가 열악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전체 이천만평에 삼십만평이 돌아갔는데도 큰 비중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전체를 다 돌리기로 말하면 사실은 독일 통일의 아버지라고 할까요, 브란트 수상 옆에는 독일 통일정책을 설계한 사람이 있어요, 에곤 바르라고. 지금 생존해 계시고 90세 초반에 브란트 수상의 오른팔이 되신 분이었는데 개성공단의 설명을 듣고 무릎을 쳤어요. 내가 동방정책을 설계할 때 이른바 독일판 햇볕 정책입니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독에다가 서독의 공단지역을 설계한다라는 그런 발상을 미처 못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북한 땅에 서로 총을 겨누고 전쟁을 하는 상대가 서로 같이 만나서 물건을 상품을 생산한다는 참 기가 막힌 프로젝트다라고 평가를 하면서 그분이 말하기를 한국에는 한국형 통일방안이 있는데 독일 방식도 아니고 베트남 방식도 아니다. 베트남은 무력통일이고 독일은 흡수통일이죠. 한국은 개성공단 모델이 곧 한국형 통일방안이다. 개성공단을 계속 키우고 확장해 가면 결국은 그것이 통일로 가게 되는 길이다. 중간지점에 경제통합이 있을 것이고 마지막 종점에는 정치통일이 있을 것이다. 제가 이렇게 개성공단을 계속 강조했는데 이 개성공단이 사실은 핵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이 핵문제가 오늘이 2013년이죠. 딱 20년 됐어요. 1993년 3월에 북이 핵조약을 탈퇴하면서 핵위기가 폭발합니다. 20년 사이에 3번의 위기가 오죠. 이번이 3차, 2003년 2차, 1993년이 1차. 공교롭게 1993년, 2003년, 2013년 10년 단위로 3번에 걸쳐서 파도가 밀려 옵니다. 20년의 핵 역사에서 딱 한번 있습니다. 뭐가 있냐하면 북이 핵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딱 한번 있습니다. 2005년 9.19라는 것입니다. 9월 19일날 북경에서 6자들이 모였는데 거기서 북이 나 핵을 포기하겠소 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년 전에 10개월 전에 개성공단이 돌아간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요. 세계적인 공단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이 인민군대의 옷을 벗겨서 넣겠다 라고 발상한 그 발상 속에서 핵을 내려 놓고 남과 북의 민족 협력을 통해서 체제 생존을 보장 받고 그리고 먹고 살길 경제 번영을 추구할 수 있겠다고 하는 확신, 확신의 근거가 개성공단이예요. 2004년 12월에 개성공단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년 뒤 2005년 9월 달에 핵포기 선언이 한번 있었던 것이죠. 개성공단이 영구 폐쇄되고 북한의 핵문제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이게 따로따로 문제가 아니죠, 연결돼서. 이번에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의 태도를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동맹국이고 우방이고 한미동맹 속에서 우리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꽃피웠다는 점을 평가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핵문제를 놓고 보면 지난 20년 동안 한쪽 당사자인 북한이고 또 한쪽에 미국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20년 왔는데 실패했어요. 뭐가 실패했냐. 20년 전에는 북이 보잘 것 없었어요. 핵과 관련해서. 핵위기는 터졌지만 핵심은 뭐였냐면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 플루토늄을 일부 숨겨놨다. 그게 몇백그램인지 이게 뭔가 석연치 않다. 이걸 조사해야 되겠다. 이 공방이 1993년의 핵위기입니다. 2013년 오늘, 1차, 2차, 3차 핵실험도 해 버렸죠. 이미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운반수단 로켓을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쏘아서 마침내 인공위성 궤도로 올려 놓았죠. 그 다음에 플루토늄만이 아닌 그 보다 훨씬 핵 폭탄 제조가 쉽고 감시 추적이 어려운 우라늄 농축을 해서 이미 핵물질을 계속 이 시간에도 만들어 내고 있죠. 20년 전에는 별게 아니였는데 20년이 지난 오늘 엄청나게 질과 양에 있어서 그 위험성이 커져 버렸단 말이죠. 결국 정책은 실패한 겁니다. 20년 사이에 써 본 정책이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군사적 공격을 포함해서 압박과 봉쇄. 또 하나는 방치해 놓는 것. 또 하나는 대화와 협상 3가지 였습니다. 20년 사이에 군사적 공격 이것은 93년, 94년에 선포가 됐어요. 백악관에서 그 당시에 군 지도자들 하고 클린턴 대통령 때인데, 영변의 시설을 공격한다, 폭격한다, 그러면 전면전으로 옮겨 붙게 되죠. 그렇게 되면 미군이 2만 5천만, 한국군 5만 그리고 한국인 백만명이 사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 보고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터 대통령이 평양에 특사로 가고 협상 국면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때 이미 심각하게 검토되서 폐기됐던 안이기 때문에 군사 공격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전쟁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설사 누가 전쟁을 하고 싶어 해도 우리 국민 모두가 일어서서 막아야 되는 거에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전쟁이에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 3가지 대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국민들이 공감하는 첫 번째가 어떤 경우에도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 한반도에서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또 이 문제를 해결하는 대원칙으로써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세 번째 원칙이 국민 공감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그 대원칙 속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되는 거죠. 이 3가지 접근법, 군사적인 접근은 안 되니까 폭격 대신 제재, 압박, 강경정책이죠. 채찍입니다. 채찍을 들고 압박하거나 봉쇄하거나 이게 주로 부시 대통령 8년간 대부분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 증거가 2000년에서 2008년 언저리까지인데 악의 축이니, 폭정의 전초기지니, 북한의 체제교체니 이런 말들이 생성하는 시기였죠. 그리고 두 번째, 놔두는 것 - 무시와 방치 이것은 오바마 대통령 지난 4년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공식적으로 전략적 인내정책이다 이렇게 포장했습니다. 전략적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참는 것이다, 사실은 무시하고 방치해 놓는 것입니다. 한국이 알아서 해라 놔 둔 거죠. 무시와 방치 기간 동안에 신이 날 정도로 핵 능력 증강을 향해서 질주해 버렸어요. 실패했어요. 그래서 얼마 전 4월달에 전쟁위기가 고조될 때 미국 국무장관이 서울에 왔잖아요. 북경에 갔어요. 도쿄에 갔어요. 돌고 미국에 가서 뭐라고 했냐면 오바마 대통령 2기 정부의 대북정책은 전략적 비인내다. 이제 팔을 걷어 붙여야 되겠다는 이런 얘기죠.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우리는 9.19를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2005년 9.19 그때는 남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6자가 모여서 거기서 북한이 선언해요. 우리는 갖고 있는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다 포기하겠습니다, 이렇게 선언하고 댓가가 있죠. 미국은 북한과 수교해 주고 또 하나 6.25때 맺어진 정정협정, 휴전협정. 휴전협정이 언제죠? 57년이요?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하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평생 잊어 버릴 수가 없어요. 제 생일날이니까요. 그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노력을 시작한다는 것을 얻었어요. 그 두 개를 얻고 또 경제 지원 세 가지를 얻고 핵 포기하겠소. 북은 9.19 틀 속에서 영변에 있는 원자로에 여러 가지 시설이 있는데 냉각기라고 있어요, 이것을 서양 TV기자들을 불러 놓고 폭파를 합니다. 실제 영변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스톱됩니다. 그리고 미국은 대신 북한을 테러리스트 국가에서 빼줍니다.

 

이렇게 한발한발 나가다가 2007년, 2008년 상황인데 나가는 중간에 한국에서 정권이 바뀝니다. 이명박 정부, 아시다시피 이명박 정권 5년 동안은 선비핵화 정책. 북이 먼저 핵을 내려 놓아라 그러면 우리가 도와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내는 북한 붕괴론에 입각해 있습니다. 북은 곧 망한다, 북은 곧 자빠지게 되어 있다, 협상하고 대화하고 도와줄 필요가 없다라는 그런 생각이 깔려 있었던 5년 이었습니다. 오바마 정부 1기의 4년의 무시, 방치 정책과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이 맞물리면서 지난 5년 동안 오히려 북은 핵 능력 강화의 시간과 공간을 벌면서 엄청난 핵능력을 갖추고 있는 거에요. 급하니까 미국은 지금 전략적 비인내다, 무시 방치가 아니라 팔을 걷어 붙여야되겠다, 9.19로 돌아와라 양자든 6자든 대화하자, 여기까지 말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사실은 박근혜 한국 대통령이 미국을 가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6자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북한 6자가 9.19를 합의를 했었는데 그것을 5년동안 죽어 있었어요. 이명박 정부 5년동안 한번도 회의가 열리지 않았어요. 아예 6자가 떠내려 가버렸어요. 지금 미국은 6자로 돌아가자 하는데 6자가 5년동안 안 열렸는데 당장 갈 수 가 없잖아요.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북은 지금 우리는 핵을 보유했다 이미, 헌법에다가 북한을 핵 보유국이다 박았어요. 노동당 규약에다가 집어 넣고 그리고 당 대회해서 우리의 국가 목표는 핵무력 증진과 경제건설 경제 노선이다 나가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핵포기 선언했던 6자로 돌아가자고 하면 돌아옵니까? 안 오잖아요. 북한은 그런 입장, 미국은 9.19로 돌아가자는 입장, 이 사이에서 한국이 핵전쟁이 나면 다 죽는 사람은 우리인데 우리가 당사자인데 북이 핵을 가지면 되겠는가, 또 전쟁을 해서는 안 되고 오바마 협상인데 우리의 안은 이런 거다 안을 가지고 가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내가 앞장 설 테니 같이 힘을 합쳐서. 그리고 또 중국이 움직이잖아요. 6자회담의 수석 대표였던 사람이 우다웨이라는 사람인데 4월달에 미국에 갔었죠. 미국과 중국이 머리를 맞댄거에요. 북한 핵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사람이 돌아 왔어요. 중국이 북한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북한이 문을 안 열어줘요. 아마 가겠죠. 미국과 중국이 움직이고 또 한국 대통령이 워싱턴에 가서 한국과 미국이 동맹으로서 머리를 맞댔으면 이런 전체적인 상황을 통합해서 김대중 대통령 같았으면 제안을 하죠, 한미간의 조율을 해 낼 것을 기대했습니다. 기대했는데 정상회담의 결과는 사실 이명박 대통령 때나 박근혜 대통령 때나 차이가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말하자면 북한이 순순히 말을 잘 들으면 도와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이른바 기싸움이라고 할까요. 어떻게 보면 지난번에 개성공단 북쪽에서 노동자들 철수하고 이렇게 되니까 4월 26일인가 25일인가 내일 아침까지 대답 안하면 우리도 중대조치한다, 이렇게 해서 그 다음날 철수 시켰죠. 그래서 일부 국민 많은 사람들이 속 시원하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 개성공단 문제는 북이 1차 책임이 있고 북한의 노동자 철수 조치는 패착입니다. 이건 건드리지 말았어야 되죠. 자기들이 말 한 것 처럼 서로 원수가 되어서 싸우던 동족이 이제 서로 악수하고 화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자기 아버지가 내준 사업이잖아요 근데 그것을 탁 걸었어요. 그건 패착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맞서서 그래? 우리도 내일 아침까지 대답안해, 그러면 우리도 빼. 본때를 보여주는 속 시원한 조치를 한 거죠. 속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국가관리를 평화관리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결과는 더 위태로워 졌어요. 더 풀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길은 있습니다.

 

그래도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우리는 많이 갔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 때는 지금처럼 오바마 정부처럼 대화하자, 적국의 수장과도 대화를 통해서도 문제를 풀겠다는 그런 대통령이 아니라 부시 대통령 8년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과는 철학이 다른 한국과 미국은 부딪혔습니다. 그 입장이 부딪히는 속에도 개성공단을 만들었고 개성공단을 제가 통일부장관으로 가서 공장을 지으려고 보니까 터는 닦아 놓았는데 미국이 반대를 했어요. 2003년에 핵위기가 발생했는데 제가 2004년에 갔으니까요. 공장을 짓는 것은 나중에 해라 이런 입장이었어요. 핵문제부터 해결하고. 그래서 미국에 가서 미국을 설득하고 개성공단을 짓고 금강산은 2000년부터 시작되서 2백만명이. 여기 금강산 다녀오신 분 계시죠? 사실 5년이란 엄청난 시간인데 5년 전에는 대만이 우리보다 뒤쳐져 있었어요. 무슨 이야기냐면 대만과 중국 사이에는 으르렁 거리면서 개성공단도 없었고 금강산 관광도 없었어요. 대만과 중국관계 보다 민주정부 10년에서 남북관계가 훨씬 앞으로 더 나아갔어요. 그런데 5년 전에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부, 대만에서는 마잉주라는 정부가 들어서서 3가지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중요한 것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다는 정경분리의 원칙. 통일이니 독립이니 하는 그런 얘기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계를 개선해 나가자. 그 다음에 세 번째가 서로 무력침공이니 무력시위니 이런 서로 위협하는 것을 일체 말자. 이 3가지원칙을 가지고 5년만에 어떻게 됐느냐 2천만 대만 인구 중에 일년에 오백만명씩 본토에 왔다갔다 합니다. 중국에서 대만에 한 2백만명. 특히 인구의 1/10이, 지난 5년 사이에 이백만명이 대만 사람 열명중에 한명이 중국 본토의 영주권을 얻어서 집을 짓거나 별장을 짓거나 자기 고향에서. 5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우리는 10년 걸려서 어렵게 개성공단 만들고 금강산 하고 철도 놓고 철도를 이어서. 전주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사서 평양역 거쳐서 신의주를 시베리아 철도로 갈 수 있는 시대. 사실 2007년 10월 4일 정상회담 합의문에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해 북경올림픽에 남북이 공동응원단을 기차로 서울에서 출발해서 평양역 거쳐서 북경까지 갔다 돌아오자. 꿈같은 시대 이야기가 되어 버렸죠. 대만 이야기를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정치가 우선이다라는 말. 정치가 미워도 결국 좋은 정치는 민족의 분단의 고통을 해소하는데 기여하는 반면 나쁜 정치는 결국 분단의 고통을 배가하고 전쟁의 위협으로 사람을 몰아 넣고 그것이 지난 5년. 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박근혜 대통령이 외교안보팀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지난 번에 중대조치한다 해서 회의를 해서 모인 면면을 보니까 국방장관이든, 통일부장관이든, 외교부장관이든, 국정원 이런 분들이 북한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북한을 가서 협상해 본 사람이 없고, 딱 한사람이 있어요. 북한에 가보고 대화를 해 본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이에요. 본인이 2002년에 평양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적이 있죠. 최고 참모들인데 생각이 다 비슷한 사람들이에요. 집단사고의 위험이라고 말하죠.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렇지 그래, 니말이 맞지, 내말이 맞지 그러면 정책계획을 엉터리로 결정할 가능성이 많아요. 집단사고의 위험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첫 번째 귀를 열어야 합니다. 적어도 민주정부 10년 동안 북과 협상하고 김정일 위원장과 5시간 대화하고 핵포기를 설득하고 6자회담 복귀를 설득하고 남북간에 통크게 협력을 요청하고 수없이 많은 실무회담과 장관회담과 저같은 사람이 수십명, 수백명입니다.

 

귀를 열어야죠. 아직 귀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두 번째가 박 대통령 한국의 닉슨이 돼라, 역사가 당신을 부르고 있다. 기회이거든요. 닉슨이라건 뭐냐. 중국과 미국은 적이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면서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국제사회로 끌어 내잖아요, 미중 정상회담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 물꼬를 바꾼 보수파 대통령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죠? 누굴까요? 노태우 대통령인데요.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7.7 선언을 합니다. 그 전까지는 대한민국 국민이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죠. 잠입, 탈출, 찬양, 고무 등등 일체의 남쪽 사람이 북에 대해서 외부로 못 꺼내지만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장사를 못해서, 예를 들어서 물건을 홍콩에서 북에서 팔고 홍콩 가서 사고 이렇게 그런식으로 했잖습니까. 7.7 선언이 뭐냐. 이제 왕래하자. 물건 사고 팔자, 교류하자, 교역하자, 왕래하자 그 선언입니다. 사실은 88올림픽인데 안전해야 되잖아요, 평화로워야 되잖아요. 그런 필요가 있었지만 어쨌든 대전환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북은 반국가단체에요. 괴뢰의 집단이에요. 북쪽은 만나도 안되고 접촉해도 안되고 그런 것이었는데 넘어서자는 것이었어요. 시대를 어쨌든 참모들이 읽었든 지도자가 읽었든 시대를 읽은 겁니다. 왜냐하면 곧 다음 해에 89년만에 베를린장벽이 붕괴하고 91년에 소련이 해체하고 파도가 오는데 파도가 닥쳐오기 전에 그 시대의 흐름에 앞서서 간 것이에요, 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그래서 UN 동시가입 하잖아요. 90년에 소련하고 고르바초프 수교하고. 소련과 적국이었잖아요. 중국과 92년에 수교하고 한소수교, 한중수교, UN가입 남북간의 불가침과 기본합의서 체결. 7.7선언으로 해서 북방정책이 봇물터지듯이 합니다. 물론 한계는 있었죠. 89년 여름인가 세계청년학생축전 평양의 어떤 경기장에서 합니다. 거기에 한국의 대학생이 나타나요. 임수경 사건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임수경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 박철원, 강재섭, 한국의 밀사단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거기는 정부에서 파견한 밀사였고 여기는 민간인 불법. 그 당시엔 창구단일화원칙, 반국가단체이기 때문에 정부가 안보 차원에서 창구를 관리하고 독점하는 것이지 민간인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고 이런건 안된다 이런 것이었어요. 참고로 2005년에 평양에 갔을 때 저는 정부대표 자격이긴 했지만 제가 민간행사에 간 것입니다. 6.15 5주년 기념행사가 2005년 6.15의 평양에 열렸는데 당시 정부에서 민간행사에 정부가 가는 것은 창구단일화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시대가 바뀌었다. 정부가 독점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성공단도 사실은 정부만의 사업이었으면 결코 못 갔습니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의 창의적인 노력과 투자에 힘입어서 김정일 위원장과 먼저 사업을 시작하고 나중에 정부가 또 협력하고 정상회담으로 뒷받침하고 민관이 같이 간 거죠. 정부와 민관이. 민주정부는 보통 정부와는 다르죠. 한계가 있었다는 얘기를 말씀드립니다만 어쨌든 80년대 후반에 일체의 교류와 왕래와 교역이 없었던 시대로부터 7.7선언으로 해서 남북교역교류시대가 온 거에요.

 

자 이제 박근혜 정부의 길은 어디로 가야되나. 제2의 7.7선언이 필요합니다. 지금 다 끊어졌어요. 전화선도 끊어지고 통신선도 끊어지고 왕래도 끊어지고 편지도 볼 수 없잖아요. 개성공단도 끊어지고 금강산관광도 다 끊어졌는데 어디로 가야되나. 1988년 25년 전 7.7선언 다시 왕래하자, 다시 교류하자, 다시 장사도 하자, 그렇게 시작되야 하는 거죠. 노태우 정부 어떻게 보면 그 뿌리 있잖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선 제일 큰 문제는 핵문제입니다만 핵문제 관련해서 우리가 발언권을 가지고 이 문제를 푸는데 접근하기 위해서는 제2의 7.7선언을 통해서 교류와 교역과 왕래의 회복을 선언하면서 포괄적 협정, 하나는 금강산관광이 5년째 끊어졌잖아요. 교류와 왕래를 선언하면 금강산 관광하는 것도 열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개성공단 끊어져 있는데 다시 또 이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두 가지를 우선 한 보따리에 넣어서 같이 대화하자, 이렇게 그런 방향에서 지도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인데 길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상황을 단절된 모든 일체의 왕래와 소통의 끊어진 상황을 계속 끌고 가면, 우리 국민은 군대를 보낸 부모의 심정은 북에서 무슨 우발적인 도발이나 이런 게 생기면, 연평도 때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리고 놀랐습니까? 불안정한 평화, 그런 길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한국의 닉슨이 되는,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면 지난 60년 분단 속에서 어떤 세계사적인 전환이 일어났느냐. 우리는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분단되어 있고 똑같이 휴전선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데 세계사는 바뀌어버렸잖아요. 소련은 없어졌고 중국은 우리의 우방이 됐고 러시아도 우방이 됐고 베트남도 수교했고 세계가 바뀌어버렸는데 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남은 철조망 쳐놓고 지뢰밭 놓고 서로 적대하고 있는 그것을 뚫어보고자 했던 민주정부 김대중 대통령의 포용정책, 햇볕정책의 결실로 만들어진 개성공단, 금강산 남북화해협력사업이 제로로 되어 버린 남북관계, 제로시대로 되어 버렸단 말이죠. 암흑의 한복판으로 왔단 말이죠. 그래서 정말 이 캄캄한 칠흑의 단절의 시대로부터 다시 광명의 시대로. 전 세계는 다 그렇게 변해갔는데 왜 한민족만 과거에 발목 잡혀 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