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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멘붕이 끝난 자리에 희망이 온다

[멘붕이 끝난 자리에 희망이 온다]

- 의제 없는 선거가 패인이다 -

미국 뉴욕타임즈 신문에 '멘붕'(men-boong)이란 낱말이 등장했다. 대선 결과 한국의 젊은세대들이 정신적 공황상태(mental collapse)에 빠졌으며 이를 '멘붕'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재벌'(Chae-bol)이란 말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오른데 이어 '멘붕' 이란 말도 곧 사전에 올라 갈지 모르겠다.

내가 출마했던 5년 전 대선에 비하면 이번 선거는 야당이 이길 확률이 큰 대선이었다는 점이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 같다. 지난 5년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심판이란 관점에서 보면 질래야 질 수 없는 선거이기도 했다.

더구나 지난 4.11총선에서 국민은 거대여당을 엄정하게 심판하고자 했으나 야당의 자충수로 여당에게 과반수 승리를 헌상한 과오가 뼈아픈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점에서 민주당은 깊은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 1 [50대의 이반은 왜 생겼는가?]

이번 대선에서 50대의 전면적 이반은 뼈아픈 부분이다. 50대 유권자의 90%가 투표장에 몰려 나왔고 63%가 여당 후보에 투표했다. 50대는 박 후보 당선에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50대를 나이 먹음에 따른 보수세대라고 분류하기는 어렵다.

50대는 87년 6월 항쟁 때 25-35세의 넥타이 부대로 민주화운동의 주축세력 이었다. 50대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지지를 보냈던 40대였다. 누구보다 열렬한 민주화 열망 세력이었던 그들이 10년 뒤 왜 돌아선 것일까?

50대는 1997년 IMF 위기가 닥쳤을 때 35-45세로 구조조정과 경제위기의 피해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었던 세대였다.

IMF 5년 뒤인 2002년 대선에서 이들은 40대로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이 시기 비정규직은 급증했고 먹고살기는 더 힘들어 졌으며 양극화는 더 깊어졌다. 기대는 실망으로 끝났다. 50대에게 민주정부 10년은 경제적으로 어두운 시절이었던 셈이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정치적 자유주의 시대를 여는 주력부대였던 50대는 그들이 만든 자유주의 정부 아래서 경제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대표적 피해자가 된 셈이었다.

대선에서 민주당은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인 이들 50대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데 실패했다. 상대방은 야당 후보를 참여정부의 틀 안에 가두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일정부분 성공했다.

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참여정부 시즌2', 즉 제2의 참여정부로 성격이 규정되는 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50대의 표심을 얻기는 어려웠다.

오늘의 50대는 가장 걱정이 많은 세대이다. 자식 등록금 걱정, 취직 결혼 걱정, 본인의 노후 걱정, 건강 걱정, 집값 걱정 등 양 어깨가 걱정 보따리로 무너져 내릴 지경에 있는 세대다.

사실 이 지점이 전략적 승부처였다.

모든 걱정거리를 각자 개인이 알아서 처리하는 各者圖生과 국가의 역할 대신 시장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맡기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로부터 방향을 전환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국민의 삶을 보호하게 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노선이야말로 50대를 비롯한 99%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대안노선이었기 때문이다.

- 2 [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의제 물타기]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때 학생들의 도시락 무상급식이 의제로 떠올랐다. 의제는 도시락이었지만 사실은 한국사회의 운영원리에 대한 전면적 전환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초기에 여당은 이를 포퓰리즘이라며 강력 반대했다. 심지어 빨갱이 정책이라고 매도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렇게 가서는 나라가 망한다며 시장직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 여당은 대패했다. 그 후 여당은 전략을 바꿨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에 대한 물타기에 나선 것이다. 여당과 그 후보는 2012년 4월 총선에 즈음해 경제민주화를 정책의 전면에 내세우고 87년 헌법 제정 당시 헌법119조 경제민주화 조항을 입안한 당사자로 알려진 김종인 전의원을 경제민주화 추진위원장으로 영입해 당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민주당은 당 강령 제1조가 경제민주화 조항이다. 그럼에도 대선과정 여론조사에서 경제민주화를 잘 이루어낼 후보로 민주당 대신 여당후보가 꼽혔다.

민주당은 여당의 변신을 멍하고 쳐다보기만 했을 뿐 경제민주화를 사회적 화두로 만들었던 저작권자로서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도 못했고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깃발만 세웠을 뿐 시대정신을 온전한 내 것으로 체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선과정에서 재벌 대기업의 순환출자 금지 문제가 경제민주화의 핵심내용으로 회자 되었지만 대중에게 이 문제는 이해하기 어렵고 공허한 논쟁으로 비쳤을 뿐이다.

경제민주화는 사실 법 앞에 만인평등이라는 원칙 확립과 노동3권의 확고한 보장을 핵심으로 한다.

대공황 시기 루즈벨트 정부는 사회보장과 노동권 보장을 통해 재분배를 강화했고 경제회생에 성공했다.

1936년 GM 자동차에서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다. 파업이 길어지자 회사 측은 구사대를 조직해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끌어 내려 했다.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주방위군을 투입했다. 누구를 끌어 냈겠는가?

폭력을 행사한 구사대를 모조리 끌어낸 뒤 루즈벨트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자들은 불만을 표출할 권리가 있다.'

이때부터 노조 대표는 회사측 대표와 같은 탁자에 앉아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부터 노동자들은 자동차를 사기 시작했고 집을 사기 시작했다. 중산층은 두터워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미국 자본주의 황금기가 열리게 되었다.

한국은 비정규직 천지다. 숫자가 많다는 얘기다. 임시직 일용직 파견직 계약직 시간제 아르바이트 등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다.

대선이 끝나고 5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두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울산, 평택, 아산, 동두천 등에서 노동자들이 혹한 겨울에 고공 철탑에 올라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항거하고 있다.

무역고 세계 8위 1조 달러, GDP 규모 1조2천억 달러 세계 14위 등 지표와 무관하게 노동자들의 삶은 열악하다. 같은 일을 하고도 비정규직은 정규직임금의 1/3 또는 많아야 절반 밖에는 받지 못한다.

쉽게 말하면 현대차 생산라인에서 앞바퀴 끼는 노동자는 정규직이고 뒷바퀴 끼는 노동자는 하청회사 소속의 비정규직이다. 현대조선소에서 우현 만드는 노동자는 정규직이고 좌현 만드는 노동자는 비정규직이다.

현대조선소의 2만 5천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노동조합원은 100명밖에 안 된다. 노조 들어가면 짤리거나 엄청난 핍박을 받기 때문이다. 현대조선소 비정규직 노조 간부가 대선 후 목숨을 던진 배경이다. 노동3권 보장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3 [복지국가를 말하려면 증세를 이야기 했어야 한다]

한국경제는 내수부문이 유달리 작다. 미국은 경제 전체에서 70%를 소비가 차지한다. OECD 국가들의 내수 평균비율은 60%를 상회한다. 한국은 53%에 불과하다. 내수를 키워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근거 수치다.

대공황 때 루즈벨트는 '빈자의 지갑에 달러를 넣어 줘라'고 말했다. Food stamp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퍼마켓에서 빵과 우유와 고기를 살 수 있게 해줬고 물건이 팔리자 생산공장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장이 돌아가니 일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간명한 유효수요 창출 논리가 지금 한국에서는 작동되지 않고 있다.

850만 비정규직, 600만 영세 자영업자, 300만 농민, 200만 청년 무직자 등 경제활동 인구의 80%가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어려운 빈약한 경제상태에 놓여 있다.

절대 다수 국민의 소득이 빈약하니 구매력도 빈약할 수 밖에 없다. 노동자의 절반인 비정규직과 약자들의 지갑은 말랐고 인구의 11%에 달하는 550만 노년층의 절반은 빈곤층으로 분류돼 구매력은 거의 0에 가깝다.

물건 살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 소비를 못하고 소비를 못하니 장사가 안 되고 장사가 안 되니 내수시장은 오그라져 있는 형태다. 따라서 전국 방방곡곡 장사가 안돼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들린지 오래다.

한국은 국민이 사회임금을 가장 낮게 받는 나라다. 개인이 시장에서 일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을 시장임금이라고 하고 노후연금, 실업보험금, 건강보험 보장금, 주택수당, 아동수당 등을 사회임금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사회임금은 가계소득에서 8%를 차지한다. 미미한 수준이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보호가 미미하다는 말과 같다.

OECD 평균은 32%이니 1/4에 불과하다. 스웨덴 같은 나라는 50%에 달한다. 미국은 17%, 일본은 30%다.

반값등록금과, 의료비 100만원 상한제, 노령연금 20만원 지급 등 보편복지의 확대는 사회임금을 확대해 가구당 소득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구매력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예컨대 기초 노령연금을 550만 노인인구 전체에게 매달 20만원씩 지급할 경우 5조원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 5조원은 거의 대부분 소비시장으로 흘러나와 내수확대에 기여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위축된 내수시장을 키워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고도 시급한 시대적 요구였다.

하지만 야당은 이를 중심 쟁점으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 여당 후보의 맞춤형 복지 운운하는 물타기 전략에 말려 들어 변별력을 잃어 버렸다.

복지는 세금 없이는 할 수 없다. 증세를 말하지 않으면서 복지국가를 얘기하는 것은 거짓이다.

한국은 GDP 대비 복지분야 지출이 OECD 30개 국가 중 꼴찌에서 두 번째다. 멕시코 8%, 한국 9%, OECD 국가 평균 22%, 독일 프랑스 등은 30%다. 평균의 절반도 안 된다.

복지 수준이 낮은 만큼 국민이 내는 세금도 낮다. 예컨대 100원을 벌어서 한국 국민은 조세로 19원 내고 사회보장 부담금으로 6원을 낸다. 100원 벌면 25원을 낸다. 이것을 국민 부담률이라고 한다. OECD 국가 평균은 100원 벌어 35원 낸다. 국민 부담이 작은 만큼 국가 재정 규모도 작다.

복지국가로 가려면 당연히 조세와 재정에 관한 논쟁이 여야간 복지국가론의 차별점을 이뤄야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지난 수년간 복지국가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증세 없는 재정마련이라는 족쇄를 스스로에게 채우고 증세론을 금기시했다. 이것이 당의 한계였다.

선거를 앞두고 증세론을 제기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이야기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대의 물줄기를 시장만능 사회로 부터 국가의 역할 강화로 대전환하자고 하는 마당에 세금 이야기를 외면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워렌 버핏세 도입이라는 부자증세를 전면에 내걸고 정면 승부를 벌이지 않았던가?

단계적으로 부자증세와 보편적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로의 대전환 논리는 대선의 물줄기를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 4 [한국과 미국의 서민층은 왜 상반된 투표를 할까?]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여성들의 높은 지지(55:43)와 저소득 서민층의 표로 승리했다. 반면 한국 선거에서 여성들과 저소득 서민층은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여당 후보에게 높은 지지를 보냈다. 양국 서민층의 이러한 지지투표 역전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수 여성과 저소득층은 모두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 속한다. 한국과 미국의 민주당은 둘 다 노선과 정책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정당 보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조건은 같은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1차적으로는 민주당이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유권자들에게 부각 시키는데 실패했음에 원인이 있다.

지난 수년간 국민들에게 어느 정당이 서민을 가장 잘 대변하는 당인가 라고 묻는 조사에서 민주당은 놀랍게도 3등에 머물렀다. 1등은 진보 정당, 2등은 새누리당 그 아래 민주당이 있어 왔다. 이것을 두고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겠는가?

2011년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 중이던 김진숙씨를 향해 달려간 희망버스는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 노동자 투쟁과 연대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더이상 무자비한 정리해고의 칼날을 휘두르지 말라는 사회적 경고 신호음이었다.

나는 제1야당인 민주당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을 말하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연대해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부르짖고 있는 희망버스에 전면적으로 결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당 차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진 문제는 개인 차원에서 책임지고 연대하고 당 차원에서는 결합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민주당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 이것이 민주당의 한계였다.

노동권 보장과 함께 복지국가 건설은 헌법이 명령하고 있는 의제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책무를 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헌법 34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사회보장과 사회복지를 증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유엔이 매긴 국가별 행복 지수에서 한국은 꼴찌 수준이다. 100점 만점에 42점을 맞았다. 아동이 학교 시험에서 42점을 받아 왔다면 잘했다고 말할 부모가 있을까?

세계 최고의 자살율이 오늘의 불행지수를 상징한다면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다가올 미래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다. 복지국가론은 바로 국민 행복문제에 대한 처방인 셈이다.

- 5 [의제 없이 승리할 수 없다]

의제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2010년 지방선거 때는 도시락 무상급식이라는 의제로 승리했고 2012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서는 야당이 복지국가로의 시대전환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소화하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된 의제를 창출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국민은 울고 있는데 눈물을 닦아줄 능력과 의제를 제시하지 못하는 정당이 승리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이것이 패인 아닐까?

이처럼 야당은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는 대안세력으로서 신뢰를 얻는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은 지난 60여년 동안 분단보수 세력이 만들어온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진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보수기득권 세력과 1:1로 맞붙어 거의 승리의 턱 밑까지 추격한 것은 의미있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국민 절반의 상실감은 깊고 넓다. 상실감의 뿌리에는 불공정한 사회의 연장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김수영 시인의 싯귀처럼 풀잎은 바람 앞에 빨리 눕지만 풀잎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맨 땅에서 피와 눈물로 민주주의와 인권국가를 세운 우리 국민은 풀잎처럼 벌써 가슴 속에서 일어서고 있다고 믿는다. 정치민주화를 넘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향한 꿈은 이미 국민 공통의 꿈이 되어 있다. 멘붕이 끝난 자리에 희망이 온다.

2012년 12월 31일  정 동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