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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통일 대박론 지지의 조건

[통일 대박론 지지의 조건]

신년 초에 갑자기 통일 이야기 봇물이 터졌다. 출발은 "통일은 대박"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에서부터 시작됐다. 통일 대박이란 말은 좋은 말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북한 붕괴를 꿈꾸며 그리는 통일 대박론은 대박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통일이란 단어는 죽은 단어가 돼가고 있었다. 통일이란 말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언어가 아니라 냉소와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통일은 부담이요 비용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는 판에 현직 대통령의 입에서 "통일은 대박"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어, 통일이 나에게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 될 수도 있단 말인가?"하고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이른바 통일 부담론과 통일 비용론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통일이라고 다 같은 통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트남식 무력통일도 있고, 독일식 흡수통일도 있다. 베트남식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통일 방식이다. 남북이 잿더미가 된 폐허 위에 통일이 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독일식 흡수 통일 방식은 남북한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독일은 동독 의회가 서독과의 흡수 합병을 결의한 데 따른 합의 통일이었다. 북한 인민대표자회의가 남한과의 흡수 합병을 결의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현 정권 사람들은 여전히 북한의 급변사태를 기대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희망사고'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 설령 붕괴한다 하더라도 남쪽에 고스란히 흡수 통일된다고 볼 수 없다. 북한은 유엔에 가입한 주권 국가이다.

게다가 북한의 붕괴와 급변사태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적 신용평가 기관들은 한국경제의 가장 큰 위험요인으로 북한이 붕괴할 경우 남한 경제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는 상황을 꼽고 있다.

따라서 통일이 대박이 되려면 그 통일은 무력 통일이나 흡수 통일이 아닌 평화적 단계적 통일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개성공단식 통일방안이다. 남과 북이 서로 화해하고 손잡고 협력해서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고 관광하고 투자하고 자유롭게 오고가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룩해가는 방식이다. 통일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이유다.

"해방은 도둑처럼 왔지만, 통일은 도둑처럼 와서는 안 된다"고 했던 함석헌 선생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구다.

그런데 일이 좀 꼬여가는 것 같다. 지난 16, 18, 20일 세 차례에 걸쳐 북한이 남쪽을 향해 "이번 설날부터 서로 비방 중상을 중단하자. 군사적 적대행위를 중단하자"고 제안해 왔다. 여기에 대해 남쪽은 "진정성이 없다"고 냉담한 반응을 보인 데 이어 스위스를 방문 중인 박 대통령이 직접 "이럴 때일수록 대남도발을 경계해야 한다"고 일축했다. 이건 남북교류 협력을 통해 지속가능한 평화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한 박 대통령의 신년 약속과 어긋난다.

박 대통령은 여기에 덧붙여 한반도 통일은 주변국들에도 대박이라고 거듭 대박론을 이어갔다. 어떻게 통일에 이를 것인가 하는 과정은 생략한 채 결과만 갖고 말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박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어떻게 통일대박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 소상하게 국민 앞에 설명할 책임이 있다.

한반도 주변 파도가 높다. 파도의 바닥에는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웅크리고 있다. 두 갑자 전 1894년 갑오년에도 집채만 한 파도가 쳤다. 조정과 백성은 국제정세에 어두운 채로 우왕좌왕하다가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마침내 조선은 침몰했다.

120년이 지난 2014년 갑오년 상황도 녹록치 않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한반도 주변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다. 국력은 커졌지만, 허리가 잘린 채 남북이 분단돼 있고, 남쪽 내부는 7분 8열 돼 있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작년 말 장성택 처형사태가 벌어졌을 때 중국의 외교부장이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한반도 사태를 논의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착잡했다. 중국의 문제는 중국이, 미국의 문제는 미국이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한반도의 문제는 한반도에 사는 당사자가 처리하는 게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는 서로 등을 돌린 채 있고, 주변 강대국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광경은 마치 1905년 미국과 일본이 마주 앉아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서로 양해하기로 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장면을 떠올리게 하기에 족했다. 한반도 문제를 한민족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현실은 자괴감으로 다가온다.

동북아 정세의 격랑 속에 우리의 목소리와 영향력을 확보하려면, 우선 남북 간에 소통해야 한다. 소통 없이 등을 지고 돌아 앉아있는 한 우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 없다. 힘이 없으면 주변 강국들을 움직일 수 없다.

남북 간 소통이 될 때 우리가 한반도 문제의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서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다. 통일대박론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소통과 공존을 위한 노력이다.

 

2014년 1월 24일

정 동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