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상임고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센터 초청 강의(2014.9.24) 

 

 

어제(24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센터에서 교수님, 박사·석사 과정 중인 분들의 초청으로《개성공단과 한국형 통일방안》을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이번 강의는 저의 대북정책과 통일방안을 집약한 것입니다. 아래 강의 원고 전문을 올립니다. 많은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개성공단과 한국형 통일방안

개성공단,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자 한국형 통일모델 
 
얼마 전 『10년 후 통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눈부시게 발전한 대만과 중국 관계를 보면서 우리라고 10년 안에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이루지 못하란 법이 없다는 뜻에서였다. 대만-중국 도시 간에는 1주일에 800여 편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대만에서 연간 500만 명, 중국에서 200만 명의 관광객이 상대 지역을 방문한다. 전화, 편지, 송금, 투자, 여행, 관광이 자유롭다. 대만 인구의 10분의 1인 200만 명이 중국 본토 영주권을 받았다. 이만하면 서로 간에 고통이 없는 사실상의 통일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민주정부 시절만 해도 남북 관계가 대만-중국 관계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10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본다. 대만-중국 관계를 봐도 그렇고, 우리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도 적대와 증오를 걷어내고 철도·도로를 잇고, 금강산 관광을 가고, 서로 총 쏘고 전쟁하던 곳에 공단을 세워 물건을 만들어내는 등 눈부시게 변화했던 경험이 우리에겐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눈앞에 길이 나 있다. 개성공단이 10년 후 통일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그걸 쭉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왜 ‘사실상의 통일’을 말하는가. 단순히 통일이라는 당위론적 개념이나 안보 차원에서의 개념을 넘어선다. 그것만이 머지않아 엔진이 꺼질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호의 경제적 성장 동력을 힘차게 재가동시킬 유일한 돌파구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은 그 성장동력의 생명줄이자 숨구멍이다.
 
이것은 우리만의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이미 나와 있다.
 
OECD 사무국이 작년(2013년) 6월에 발표한 한국 경제 전망 보고서를 보면, 2031년이 되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0%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다른 말로 성장 엔진이 꺼진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잠재성장률 하락이 급속도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몇 해 전 세계 최대의 투자 금융기관인 골드만삭스에서는 정반대의 예측을 내놨다. 한국이 30년 뒤에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40년 뒤에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을 했다. 
 
골드만삭스의 <글로벌 경제, 상품 및 전략 연구소>는 2009년 9월 ‘글로벌 경제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남한과 북한이 '평화적·점진적 통일 한국'으로 가면, 본 연구 결과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 통일 한국의 잠재적 규모이다. 북한의 성장 잠재력이 실현된다면, 미 달러화 기준으로 통일 한국의 GDP가 30년에서 40년 후 프랑스, 독일을 추월하고 일본까지도 앞지를 수도 있을 것으로 우리는 내다보고 있다. 이러한 예측에서 보면 2050년 통일 한국의 규모는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G-7 국가와 동등하거나 넘어설 것이다.(*2050년 통일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 86,000달러 전망)

 

​북한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강력한 잠재력이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으며 일단 의미 있는 경제 개혁이 단행되기만 하면 투자가 유입될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요인에 집중하고 있다. ①풍부하고 경쟁력 있는 노동력, ②남한 자본과 기술, 북한의 천연자원과 노동력 간의 막대한 시너지 효과의 가능성, ③체제전환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생산성 향상과 통화절상으로 인한 커다란 잠재적 이익.​​

 

​한국이 독일식 통일 방식(흡수통일)을 선택하면, 한국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비용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비용이 가장 적은 선택은 한 국가에 두 개의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이 공존하는 것을 허용하는 중국과 홍콩의 통합방식이 될 것이다. 적절한 정책만 뒷받침된다면 남북한의 통합 비용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북한 경제 붕괴를 대비해 통일 비용을 줄이기 위한 적절한 정책이 필요하다.』
 
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평화적·점진적 통일 한국’은 내가 주장하는 ‘사실상의 통일 상태’와 내용상 거의 일치한다.
 
왜 이렇게 국제적 신인도가 높은 두 기관이 상반된 전망을 하는 걸까? 골드만삭스는 개성공단이 쭉 확장된다는 것을 전제로 삼은 것이고, OECD 보고서는 남북이 분단된 현 상태에서 남한 단독 경제를 전망한 것이다.

사실 따져 보면 상식이다.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려면 인구가 늘든지, 기술 혁신이 일어나든지, 자본 투자가 활발하든지 해야 하는데, 현재 대한민국은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다. GDP 성장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분기별 성장률이 0%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 상태에서는 누가 대통령이라도 국내에서는 용빼는 재주가 없을 듯하다.

​골드만삭스 보고서도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국내의 여러 학자들과 전문기관들도 그렇게 예측한 곳이 많지만 이걸 확인시켜준 의미가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한국 경제가 남한의 자본과 기술에다 북한의 노동력과 풍부한 광물자원을 결합하면 다시 한번 고성장 시대로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북한은 북한대로 발전해서 20년 후에는 북한의 국민소득이 한국의 절반까지 따라올 수 있다고 예측했다. 북이 베트남·중국 모델을 착실하게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

​한국이 세계 최고의 제조업과 첨단 산업 경쟁력을 가진 독일과 일본을 제친다. 상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지난 20여년 동안 세계 1등을 지켜왔던 조선 산업이 최근 들어 중국에 추월당했다. 그런데 만일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합의대로 원산에 조선 단지를 착공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남쪽의 울산·거제와 북한의 원산은 바닷길로 한나절 거리다. 원산에 조선소를 지어서 여기서 화물선, 여객선, 컨테이너선 같은 저부가가치 선박을 건조하고, LNG선이나 해양 플랜트선은 남쪽에서 짓고 이렇게 조선 산업의 일관체계를 구축한다면 시너지가 발생한다. 중국에 기술을 넘겨줘서 추격을 당할 염려도 없어지고 일석삼조다. 조선 1등 국가 지위를 앞으로 백 년은 끄떡없이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경제 또한 불같이 성장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더 이상 전쟁 걱정 필요 없는 완전한 평화 공동체, 경제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건 비단 조선 산업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 산업, 제철 산업, 에너지 산업, 반도체, IT 산업 등 전 분야에 걸쳐 윈윈하는 모델이 가능하다.

이렇게 북한 경제가 자체 발전을 하게 되면 통일 비용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북한이 한국 경제에 두통거리가 아니라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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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은 현재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한국형 통일 모델’이기도 하다. 내가 몇 년 전에 독일에 갔을 때 에곤 바르(EGON BAHR) 박사가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분은 빌리 브란트 수상의 특별보좌역이자 정무장관으로서 동방정책을 설계한 분이다.
 
그런데 내가 개성공단 사진을 보여주고 몇 가지 설명을 했더니 그 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이건 놀라운 상상력이다. 내가 동방정책을 설계할 때 동독 지역에 서독의 공단을 만든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대단한 상상력이다”고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한국에도 통일 모델이 필요한데, 한국은 베트남 모델도 될 수가 없고, 독일 모델도 될 수가 없다. 한국형 통일 모델이어야 하는데, 한국형 통일 모델이 바로 개성공단 모델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개성공단을 확장해서 계속 따라가면 그 중간에 경제 통일이 올 것이고, 종점에 마침내 한반도의 통일이 올 것이다”고 단언했다.  ​

"30만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 개성공단에 넣겠다​"

개성공단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한 것이지만, 처음에 기획하고 설계한 것은 정주영 회장이고 참여정부 때 그림을 다 그렸다. 그래서 2003년에 터 기공식을 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을 하고 남북 간에 공단을 북한에 만들기로 했는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처음에는 해주를 희망했다. 그런데 북한은 해주는 해군사령부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전격적으로 개성을 제안했다. 정주영 회장은 군사 지식은 없지만 개성이란 지역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어서 애초부터 개성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정주영 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경상남도 창원공단을 모델로 개성공단의 밑그림을 설명했다. 창원은 과거에 경남 의창군의 하나의 면이었는데 50만 공단이 들어서는데 2000만 평의 규모다.
 
정주영 회장의 설명에 입이 딱 벌어진 김정일 위원장은 “이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세계적인 수준의 공단을 만들겠다”고 설득했다. 이어 “1단계로는 섬유를 비롯한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넣지만, 점차적으로 전기, 전자, IT, 바이오 등 첨단공단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토지비용이 낮아야 한다. 그리고 인건비가 저렴해야 경쟁력이 있을 것 아니냐”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개성공단 부지의 50년 사용권에 평당 14만 9000원인데 인건비가 세금 포함해서 57불로 시작한 것이다.
 
2000년 정주영 회장이 개성공단을 시작할 때 김정일 위원장과 나눈 대화 내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정 회장은 김 위원장한테 “2000만 평이 완공 되면 적어도 창원처럼 50만 공업도시가 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만 35만 명에 달하는데, 개성 주변의 인구가 30만 명밖에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 노동력 조달은 어떻게 하죠?”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이거 다 하는데 몇 년 걸립니까?”라고 되물었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착공해서 8년이면 됩니다”고 답변했다. 김 위원장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8년이라…. 우리가 6.15도 했고, 8년이면 남북관계도 발전했을 것이고, 그런데 남과 북에는 군대 숫자가 너무 많아요. 자, 그 단계가 되면 내가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서 한 30만 명을 공장에 넣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결과적으로 실현은 안 됐지만, 북한 최고 지도자의 머릿속에 그런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는 개성공단의 노동력도 되면서 자연스럽게 군축이 되는 것, 그런 단계적 발전 모델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햇볕정책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미국까지 날아가 '강경 매파'를 설득하다​
 
나는 참여정부 때인 2004년 7월 1일 통일부장관으로 부임했다. 내가 통일부장관에 취임했을 때 개성공단은 벽에 부딪혀 있었다. 나는 통일부 직원들을 모아놓고 “내가 통일부 장관으로 온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개성공단에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 사명이다. 내가 그걸 하려고 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막상 앉아서 들여다 보니까 속도조절론이 있었다.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고 하니까 미국이었다. 미국이 ‘핵 문제나 해결하고 이걸 해야지. 2차 핵 문제가 불거졌는데 북쪽에다 무슨 공단을 짓느냐. 그건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관으로서 내 생각은 달랐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야지. 무슨 소리냐”고 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협조를 해주지 않으면 공단을 지을 수가 없다. 북한은 미국의 적성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적성국가가 몇 개 있다. 쿠바가 적국이고, 북한이 적국이고, 이란이 적국이다. 적국에다 전략 물자, 군대용으로 쓰일 수 있는 물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컴퓨터, 통신기 등도 다 군대용으로 쓸 수 있는 물품이다. 그것은 이중 용도 물자라고 하는데 산업용과 군사용 이중으로 쓰일 수 있는 물자라는 뜻이다. 거기서 미국의 원천 기술이 10% 이상 들어 간 것이 적국에 들어갈 때는 미국 기술을 가지고 들어가는 거니까 미 국무성의 허가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장관으로 가자마자 한 것이 긴급 TF를 만들어서 “개성에 15개 공장이 시범 단지에 들어가는데, 거기 들어가는 품목 즉 책상도 가지고 들어갈 것이고, 재봉틀도 가지고 들어가고, 컴퓨터도 있고, 공작 기계도 있다. 오늘부터 그 아이템 목록을 정리하라. 거기서 전략 물자에 해당될 수 있는 것을 분류하는 것은 공무원들만으로는 어려우니까 각 산업 분야의 협회, 기계공업협회, 섬유공업협회, 자동차공업협회 등과 함께 TF를 무역협회에 설치하고, 국장급 책임자를 '당신은 통일부로 오지 말고 그리로 출근하시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밤을 새워서 목록을 작성했다. 통일부 간부들하고 외교부 1급 실장을 묶어서 미국 상무성으로 보내서 우선 서류 검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의 국방부가 문제였다. 대북 정책 차원에서 결정이 나야 하니까 그렇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직접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을 설득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04년 8월 말 나는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네오콘 수장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통일부 장관으로서 미국의 국방장관을 만날 수가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통일부 장관은 대한민국밖에 없으므로 회담 성사가 안되는 것이다. 그럴려면 우리 국방장관한테 가서 “미국의 국방장관한테 얘기를 해주십시오”라고 해야 하는데, 이 중차대한 문제를 남을 통해서 설명을 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럼스펠드와의 회담 '개성공단 세일즈'
 
다행히 그 당시 나는 통일부 장관과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을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NSC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의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국무장관인 콜린 파월을 만났는데 그는 긍정적이었다. 콜린 파월은 한국의 동두천 미 2사단에서 1년 동안 중령으로 대대장을 했던 사람이어서 판문점이나 동두천 일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개성공단 사진을 보더니 이게 어디냐고 물었다. 자기로서는 DMZ를 가로질러서 거기다 공단을 만든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파월은 군인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긍정적이었다. 나는 파월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2003년 1월 다보스 포럼에 가서도 파월을 만나 북한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북한 문제에 대해 협상을 통해서 해결해야 된다는 온건파였다. 속칭 비둘기파였다. 그래서 개성공단은 좋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미 국방부였다. 그래서 럼스펠드를 만났다. 그는 부시 행정부 내의 강경파(매파)인 네오콘 그룹의 수장이었다. 직책은 체니 부통령이 위였지만 럼스펠드는 오랫동안 체니의 후원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럼스펠드는 포드 정부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고, 부시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소련의 데탕트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물론 북한에 대해서도 강경한 견해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를 어떻게 설득할까. 사실 막막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 남북 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도 중요한 요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명확한 입장이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바로 개성공단에 관한 ‘정동영-럼스펠드 담판’이었다고 생각한다.
 
2004년 8월 31일 오전 10시. 펜타곤 회의실에서 한 시간쯤 럼스펠드와 회담을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개성공단 세일즈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개성공단은 경제 사업인 동시에 군사전략 사업 즉 군사전략적 가치가 큰 안보 사업입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어떻게 럼스펠드를 설득할 것인가를 놓고 미국 가기 전부터 고민을 했는데, ‘럼스펠드는 개성공단이 경제적 가치가 높은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미국 국방부가 경제적 가치가 있는가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결국 군사전략적 가치 중심으로 설득했다.
 
내가 럼스펠드를 설득한 논리는 이랬다.
 
첫 번째로 한미동맹이 대한민국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취약점은 종심(縱深·작전 범위나 길이)이 짧다는 것이다. 휴전선의 장사정포로부터 서울까지가 불과 40마일이다. 포를 쏘면 3분 내에 광화문에 떨어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에 비해 평양은 휴전선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미사일로 쏘지 않으면 닿지 않는다. 그런데 서울은 일반 포로 쏴도 대포가 떨어진다.

 

종심이 짧다는 것이 결정적인 취약 요소인데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한미동맹이 집중하는 것이 조기 경보 기능을 확보하는 것이다. 조기 경보 기능은 불이 나면 사이렌 울리는 것과 같은 기능이다. 즉 ‘북의 이상 징후가 있다. 북이 도발 징후가 있다. 전쟁 징후가 있다.’ 이런 것을 한 시간 전에 아느냐, 하루 전에 아느냐, 이틀 전에 아느냐에 따라 피해 정도(생존율 등)에 큰 차이가 있다. 피해 정도가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이 24시간이냐, 48시간이냐에 따라 180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미동맹이 집중하는 것이 1번 영상 정보 획득, 2번 음성 정보 획득, 3번 휴민트(human intelligence) 정보 획득이다. 1번 영상 정보는 인공위성으로 계속 감시하는 것이다. 위성사진을 계속 찍어서 사진을 식별하는 것이다. 예컨대 ‘탱크 몇 대가 왜 이쪽으로 갔지, 무슨 훈련인가’ 하고 계속 위성 카메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정찰기를 띄워서 통신을 감청하는 것, 상급 부대와 하급 부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귀를 대고 듣는 일이다. 세 번째는 인간 정보다. 북쪽에서 나온 사람도 있을 테고 집어넣기도 해서 정보를 수집해서 분석하고 판단해야 한다. 거기에 투입되는 인력과 돈, 자원과 물자가 엄청나다.
 
예를 들면 태평양 연안의 몬터레이 근처 산꼭대기에 미 국방 외국어대학이 있다. DLI(DEFENCE LANGUAGE INSTITUTE)이다. 그 곳에 400명의 한국어 교수가 미군 병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24시간 한국어 집중 교육을 한다. 가장 교수가 많은 언어가 아랍어, 두 번째가 중국어, 세 번째 언어가 한국어인데 한국어라기보다 북한어다.
 
그게 바로 앞서 언급한 영상 정보, 음성 정보, 인간 정보를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미국 군인들이 하는데 인공위성으로 찍는 것도 돈이고, 정찰기로 감청하는 것도 돈이다. 또한 북쪽에서 무슨 폭발이 있어도 우리는 모른다. 국방부나 청와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보가 없다. 결국 며칠이 지나야 알 수 있는 상황인데 미국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전후 사정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다.
 
이른바 자주 국방에서 가장 핵심 요소가 한국군의 정보 획득 능력인데, 이점이 우리는 떨어진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백두, 금강 계획이라고 해서 우리도 사진 찍고, 듣고 하는데 수조 원을 투입했다. 하지만 정찰 기능을 강화하고, 향상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우리는 달린다. 그런데 미국이 100을 알고 있으면, 알고 있는 대로 100을 다 알려주고 즉시 알려주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알려 주기는 하는데 다 알려주느냐 시간을 끌다가 적당히 알려 주느냐. 이것은 전형적인 갑을 관계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럼스펠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심이 짧습니다. 그런데 개성이라는 곳이 6.25 때 제2축선입니다”라고 했다. 제1축선은 철원에서 서울로 직통으로 왔고, 제2축선은 개성 방면에서 문산을 거쳐 서울 미아리 고개로 넘어 들어왔다. 6월 25일 새벽에 포를 쏘기 시작해서 28일 새벽에 서울로 사흘 만에 들어와 버렸다. 그만큼 개성은 남과 북 서로에게 요충 지역인 것이다.
 
그리고 난 뒤 내가 “여기(개성)를 북이 가로 8킬로미터, 세로 8킬로미터 열어준다고 합니다. 군사전략적으로 이를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철조망 즉 DMZ 군사 분계선 너머의 북한 영토를 준다는 것인데, 그걸 왜 하지 마라, 속도 조절하라고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위성으로 사진 찍는 곳을 내준다는데 안 할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하니까 럼스펠드가 대답을 못 한다.
 
위성사진에 따르면 개성공단을 건설하고 있는 부지 자체가 북한 6사단, 64사단, 2군단 포병여단 이렇게 6만 명의 병력과 화력이 밀집한 부대 주둔 지역이었다. 포 진지와 탱크 부대가 있고, 중화기와 대포와 2개 사단 병력과 1개 포병 여단이 쫙 깔려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 곳을 비워준다는데 멈출 이유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럼스펠드는 경청했다. 설명을 잘 들었다면서 달리 반문도 없었다.
 
당시 럼스펠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2003년 3월에 이라크전이 시작된다. 우리도 자이툰 부대를 파병했다. 1년 반쯤 됐을 때인데, 개전하자마자 바그다드를 점령해서 그 때는 희생자가 적었다. 그런데 점령하고부터 폭탄 테러가 터지기 시작했다. 미군 병사 전사자가 1000명이 넘고, 2000명이 넘고, 5000명까지 갔다. 2004년에는 삼사천 명까지 희생자가 생겼을 때, 이라크 전쟁에 온 정신이 가 있어 수렁에 빠졌다. 바그다드만 점령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점령 이후에 희생이 너무 컸다. 미국 내 비판 여론도 고조되고, 그 상황에서 이라크에 몇 십만 명을 파병해 놓고 있었다. 그 와중에 멀리 한반도의 휴전선과 개성공단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신경이 다른 데에 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얘기를 들어보니 딱히 반박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럼스펠드는 나에게 설명 잘 들었다고 하더니, ‘보여 줄 것이 있다’면서 회의실 옆 장관 개인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동그란 책상 위의 깔판 밑에 흑백 한반도의 위성사진 지도를 보여줬다. 밤에 찍은 사진으로 남쪽은 서울, 부산 등 전부 불야성인데, 북쪽은 평양만 하얀 점처럼 생겼고 나머지는 깜깜했다. 럼스펠드가 “이게 한미동맹의 우산 아래 발전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라고 했다. 나는 “개성공단이 만들어지면 한미동맹과 함께 이루어진 남한의 불빛이 압록강변까지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다시 지하 벙커 같은 곳으로 데려가더니 나한테 북한과 중국의 미사일 능력과 위협에 관한 특별 브리핑을 해줬다. 이는 미사일 방어망(MD)의 필요성을 나에게 입력시키려는 의도로 보였다.
 
미 국방부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증강되고 있으니 한국이 MD(Missile Defense)에 참여하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DJ 정부와 참여정부는 미국의 MD 계획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걸 설득하기 위한 브리핑을 한 것이다.
 
그렇게 미국 국방부의 관심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그것을 방어하느냐에 있었던 것이고, 나의 관심은 북쪽에 개성공단을 만들어서 화해 협력을 통해서 위협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MD가 해법이 아니라 미사일을 쏴야 할 이유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미국 쪽 MD에 들어가면 국방비가 엄청나게 들어간다. 미국 국방부의 강경파들은 한국을 MD망에 끌어들여 한국이 미국 무기를 사주기를 바라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무부가 개성공단을 지원한 것은 미국도 국무부나 상무부는 원래가 유연했고, 국방부가 브레이크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럼스펠드를 잘 설득했다기보다는 럼스펠드와 담판을 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이나 서구 사회는 합리적으로 얘기를 해서 납득이 되면 선선히 받아들이기도 한다. 개성공단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설명한 것이 앞뒤가 맞으니까 입장을 바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한국 담당 보좌관은 리처드 로리스(Lawless)였다. Lawless는 무법자라는 뜻인데 우리한테는 악명이 높은 국방부 차관보로 한국 담당이다. 미국 CIA 직원도 했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는 잘했다. 그가 나중에 특파원들한테 브리핑을 했는데, 내가 나온 뒤에 럼스펠드가 로리스한테 “로리스, 아까 미스터 정이 얘기한 것 있지, 그거 대통령 보고 자료에 넣어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부시한테 보고를 했다. 부시도 정신은 이라크에 가 있었는데 럼스펠드가 얘기를 하니까 승인을 했다.
 
그리고 나서 미국이 속도조절론 대신에 적극적인 협력으로 돌아섰다. 개성공단 사업도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15개 공장의 설비에 대해서 한 건도 거부하지 않았다. 100% 승인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도 박차를 가해 그 해 연말인 12월 15일 마침내 개성공단 제1호 공장인 냄비 공장이 가동된다. 그게 개성공단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왜 미국이 허락을 해야 하는지, 왜 우리 마음대로 개성에 공단을 짓는 결정을 할 수 없는지 의문이 갈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국내법 때문이다. 미국 국내법에 EAR법이 있다.(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 수출에 관한 행정 규제법이다. 적성 국가인 쿠바, 북한, 이란 등의 나라에는 전략 물자, 민간용인데 군수용으로 바뀔 수 있는 이중 용도의 전략 물자는 못 가지고 가며, 특별한 경우에는 미국 상무부의 승인을 받으라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북한은 적성국이다. 전략 물자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무기뿐만이 아니라 컴퓨터, 정밀기계, 통신기기 등 민간용이지만 군대에서도 쓸 수 있는 이런 것들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1960년대인가 알라스카 해안에서 좌초한 소련 잠수함을 미국이 인양했다. 건져서 보니까 일본의 도시바 부품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도시바의 임원 전원이 사퇴하고, 일본 정부 사절단이 미국에 가서 싹싹 빌었다. 소련에 전략 물자를 팔면 안 되는 것이었다. 사건이 정부 차원으로 비화되었다.
 
미국의 지적재산권이 10% 이상 들어간 물자에 대해서는 미국 국내법에 그러한 규정이 있어서 안 지킬 도리가 없다. 컴퓨터는 CPU 안에 ‘인텔 인사이드’라고 쓰여 있는 것은 컴퓨터의 원천 기술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하나 마음대로 못 가지고 들어가는 실정인데, 그렇게 되면 공장을 돌리지 못 한다.
 
하지만 럼스펠드와 담판 이후 개성공단의 공장별로 수천 개 아이템 목록을 작성해서 냈는데 100% 통과가 되었다. 전략 물자 반출 문제와 관련해서도 부시 행정부 하의 미 상무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서 가능했다. 물론 설득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미국과 거기에 대해서 일정한 공감대가 없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상무부 직원들이 2주일간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아이템 리스트 검토를 해줬고, 적극 협조해줬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누구인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보고, 여차하면 외과 수술 식으로 영변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 중의 강경파이다. 그가 개성공단에 대해 속도 조절하라고 제동을 걸고 있었는데, 내가 미국까지 날아가 설득시킨 결과 입장을 180도 바꾼 것이다. 그 뒤 연말에 럼스펠드 장관이 한국에 왔다. 청와대에서 만찬을 하는데, 우리 국방부 장관한테 “통일부 장관 미스터 정은 여기 안 오느냐”고 찾았다고 한다. 이점이 바로 자신이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대목이다.
 
'메이드 인 개성공단'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내가 통일부 장관이 되고나서 6개월 뒤인 2004년 12월 15일에 개성공단에서 첫 번째 물건이 생산되었다. 물론 공장터는 전에 불도저로 밀어 놓았었다. 부랴부랴 공장 패널 갖다가 세우고, 연말 안에 물건을 만들어 내자고 해서 밀어붙였다. 그렇게 해서 123개의 공장이 세워졌다. 1호가 123호까지 나간 것이다. 그래서 직원이 5만 3000명까지 갔다.
 
개성공단의 가치는 1번이 군사전략적 가치, 2번이 경제적 가치, 3번이 미래적 가치다. 그런데 1년 전 개성공단 철수 사태에서 보듯, 아직도 정부여당이나 보수진영의 인식은 한참 거리가 멀다.
 
그와 관련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개성공단에는 신변 위협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개성공단에서 단 한 번도 신변 위협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막판에 철수 명령을 내렸을 때 안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면 서로 먼저 나오려고 하고, 인질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겠는가. 그럴 염려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안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번째, 개성공단에 식량난은 없었다. 왜냐하면 5만 3000명의 점심과 야간 간식을 주기 위한 식량이 부식 창고에 가득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100~200명 남아 있는데 무슨 식량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박근혜 대통령 책상 위에 올라간 보고서에 개성공단에 있는 우리 국민이 식량이 바닥나서 심지어 쑥을 뜯어 먹는다고 잘못 보고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나라 지도자라도 우리 국민이 쑥을 뜯어 먹고 살거나, 의료진을 못 가게 하면 흥분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개성공단 중단시 사실은 식량난은 없었고, 쑥을 뜯어 먹었다는 것은 사실 관계가 전혀 다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개성공단 옆에는 삼봉천이라는 냇가가 있다. 삼봉천 옆에는 공해 없는 청정 지대의 쑥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해마다 봄철 3~4월이면 쑥을 뜯었는데, 개성공단의 공장이 멈춰서서 할 일이 없어 마침 쑥을 뜯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신문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쑥을 뜯어 먹고 사는 걸로 보도가 되었다. 이렇게 와전이 되어 대통령의 보고서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개성공단 입주 업체 대표의 얘기다. 그렇다면 이것이 개성공단 사태를 불행하게 만든 작은 단초다.

 

세 번째는 123개 공장 전체가 흑자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사실 흑자가 안 나면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건비가 양질의 노동력 한 명을 쓰고도 한 달에 13만원인데, 남쪽에서 한 명을 고용할 수 있는 비용으로 거기서 거의 15~20명을 고용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토지 비용이 평당 14만 9000원이라서 대부분의 공장이 천 평, 이천 평, 사천 평씩을 매우 넓게 사용하고 있다. 토지 비용에 대한 부담이 남쪽에 비하면 거의 제로에 가깝게 수렴하는 것이다. 50년 사용권이 14만 9000원이기 때문에 흑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은 개성공단의 생산액 규모가 10분의1로 축소돼서 발표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에 개성공단에서 5억 달러, 즉 5000억 원어치 물품을 생산했다고 나온다. 왜 5000억이냐 하면, 예컨대 셔츠를 한 장 만들었는데 실제로는 10,000원 짜리다. 그런데 개성공단에서 기록이 되는 것은 원단 값, 실 값, 단추 값 같은 원부자재 비용은 빼버리고, 나머지 인건비, 공장의 전기료, 관리비, 세금, 수도료 등만 합쳐서 “이거 1000원이구먼” 하고 1000원으로 계산한다. 따라서 실제 물건 값은 1000원 짜리가 아니라 10,000원 짜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것은 5000억이 아니라 실제로는 5조 원 정도가 되는 것이다. 원부자재 비용이 인건비나 관리비의 10~12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성공단의 생산액이 5000억이 아니라 5조원이 되는 게 맞는데,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규모를 줄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를 언론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다.

 

아마도 어떤 규제조치나 제한이 없었다면 이익이 많기 때문에 서로 들어가려고 줄을 섰을 것이다. 개성공단의 장애물은 딱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정치적 불안이다. 정부가 제 역할을 해서 문제해결 능력을 가지고 해소해 주면 즉 군사적 충돌 가능성만 없애주면 대한민국 중소기업들은 다 들어가고 싶어 한다. 작년에 개성공단이 중단 되었을 때 오히려 일반 국민들이 개성공단에 대한 존재감을 아는 계기가 되었다. 올해 9월 16일이 개성공단 재가동 1주년이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다. 정상화가 되면 개성공단은 역설적으로 불사조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매일매일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개성공단을 통해 한국형 통일 모델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 방안은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이다. 이것은 노태우 정부 때 만든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수정 보완해서 김영삼 정부 때 만든 방안이다. 그런데 통일은 통일 방안이 훌륭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실천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책상에서 종이 위에 만든 통일 방안은 민족 공동체 방안이고, 현장에서 돌아가는 실천 모델은 개성공단 모델이다.

 

 현재 개성공단에서는 매일매일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광화문에서 매일 개성공단 가는 통근 버스가 있는데 사람들은 잘 모른다. 개성공단을 시공한 현대아산과 관련해서 협력 업체 등이 계속 들락날락해야 하니까 일요일은 빼고, 매일 가는 통근 버스가 있다. 가회동 현대 본사 앞에서 광화문을 지나가니까 서울 한복판을 지나간다. 매일 아침 7시 반에 출발해서 10년 동안 통근 버스가 다녔다. 연평도에서 대한민국 영토에 포탄이 떨어졌는데, 그때도 다음 날 하루 멈췄다. 그리고 천안함 때도 하루인가 멈췄고 계속 갔다. 연평도나 천안함 때도 바로 하루 지나서 통근버스가 갔기 때문에 ‘아, 전쟁은 안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을 보면 마치 전쟁이 날 것 같이, 보복 응징을 할 것 같이 했지만 태평하게 아침에 버스로 출근하고 오후 5시 되면 퇴근하고 그랬다. 아무 때나 가는 것은 아니고, 하루에 22차례를 연다. 가령 9시, 9시 반, 10시, 10시 반, 11시 이렇게 30분 간격으로 입출경하는 시간이 있다.

 

세계에서 적대적인 나라가 국경선에 철조망 깔아놓고, 지뢰밭 설치한 지역을 아침 저녁으로 건너다니며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은 묘한 장면이다. 해가 떨어지면 철문이 닫히고, 다시 총을 거총하고 쳐다보고 있다. 해가 밝으면 철문을 열고 총을 내려놓고 이쪽에서는 차를 들여보내고, 저쪽에서는 받는다. 거기에서 남쪽 기업 관계자가 민주정부 때 많게는 2000명까지 숙식을 하며 지냈다.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있고, 들어갔다가 일주일 있다가 나오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매일매일 개성에서는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로 만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는데, 일하는 얘기도 물론 하지만 “애는 학교에 잘 다닙니까? 집안 살림은 어때요?” 등의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대화를 나누고 남쪽 사람은 북쪽 사람을 이해하고, 또 북쪽 사람은 남쪽 사람의 삶의 방식과 내용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 바로 통일이 아니겠는가?
 
숫자를 보더라도 북쪽 인원은 5만 명이 넘고, 남쪽 인원은 많을 때는 2000명씩 가서 상주하기 때문에 그 접촉이 한 두 해가 지나고 10년이나 되니까 북한 전역에서 개성만큼 통일을 향해서 전진한 도시가 없다. 그러니까 개성을 늘려 가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다. 
 
중소기업과 청년세대의 유일한 돌파구이자 블루오션
 
현재 가동 중인 개성공단 크기는 원래 설계도의 64분의 1이다. 왜냐하면 2000만 평은 64평방킬로미터인데, 현재 가동 중인 123개 공장이 입주해 있는 면적은 30만 평, 1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개성공단은 당초 계획대로라면 2012년까지 총 2000만 평의 부지 가운데 800만 평은 공단 부지로 2000개의 공장이 들어서고, 나머지 1200만 평에는 아파트, 상가, 공원, 골프장 등 근린 시설을 만들어 총 50만 명의 인구가 생활하는 첨단 공업도시로 완성이 됐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해주, 남포, 원산, 신의주, 나진, 선봉, 함흥, 청진 등 해안선을 따라 경제 특구를 설치했었더라면, 북한은 지금쯤 중국과 베트남을 뒤쫓아 가고 있었을 것이다.

 

개성공단 도시가 인구 50만 명 단위로 들어서게 되면 적어도 생산총액이 1년에 500억 불 이상 되리라고 본다. 한국은행 추계로는 현재 북한 GDP가 300억 불이라고 한다. 그러면 1인당 국민소득이 1200불이 넘는다는 얘기인데, 기초적인 식량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북한이 베트남보다 잘산다고 하는 격이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1년 GDP를 100억불 수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개성공단을 완공해서 연간 생산품의 가치가 500억 불 이상 규모가 되면 그건 실질적으로 북한 경제의 5배에 해당한다.

 

또한 개성공단은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유일한 활로이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중국도 가 보고, 동남아도 가 보았는데 활로가 안 생겼다. 현재 중소기업들은 수직 계열화, 재벌들의 하청 구조화되어 있다. 현재 중소기업에는 4가지가 없다. 돈이 없고, 사람이 없고, 판로도 없고, 기술이 없다. 신용이 약하니까 금융 쓰기도 어렵다. 자기 돈도 없지만, 신용을 쓰기도 어렵고, 땅값도 비싸고, 중소기업에 인재가 안 온다.

 

그런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인 해법을 찾기가 힘들고, 중소기업 정책을 어떻게 해도 즉효가 나기 어려운데, 개성공단에 123개 공장을 두었더니 팔팔하게 살아난다. 123개 공장이 모두 흑자인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123개가 아니라 1200개, 아니 12,000개를 갖다 놔도 다 흑자가 날 수 있는 구조다.

 

따라서 이 중소기업의 활로를 한 차원만 더 키우면 된다. 지금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3% 대로 주저앉았다. 이명박 정부가 5년간 기를 쓰고 성장률을 끌어올리려고 4대강도 파헤치고 안간힘을 썼지만 5년 평균이 2.9%밖에 안됐다. 앞으로 갈수록 잠재성장력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 졸업하고 취직한다고 할 때쯤이면 우리의 경제성장이 멈춰선다는 전망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데, 마땅한 돌파구가 없다.

 

이유는 첫째 자본을 더 투입할 수 없는 환경, 둘째 노동인구 감소 때문이다. 저출산으로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다. 해법은 정년을 없애거나 올려서 노인 노동력, 여성 경제 활동 인구를 늘리는 수밖에 없는데, 이것도 금방 쑥쑥 늘리는 데 어려움이 있다.


셋째는 생산성 정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 혁신의 문제도 우리의 교육 시스템으로는 한계에 부딪혔다. 노벨 과학상이 안 나온다. 한 문제 안 틀리려고 달달 외우는 반복 주입식 수능 교육이나 입시 교육을 해서 무슨 획기적인 상상력과 창의력이 나오겠는가.
 
결국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블루오션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개성공단을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 그게 밥이고 일자리고 꿈이 될 것이다. 
 
남북 소통의 차단벽 ‘5·24 조치’ 해제해야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8년 5.24조치를 통해 남북교류를 중단시켰다. 2004년 12월에 첫 가동을 하고, 2006년도에 만 명을 넘어서고, 2007년까지 커지다가 2008년 정권이 바뀌면서 개성공단 계획이 갑자기 얼어붙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하여 2010년 5월 24일 대북조치를 발표하면서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투자를 금지하고, 공단체류 인원을 평소의 50~60% 수준으로 축소했는데 그 기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개성공단 입주 기업은 기존 주문 생산 계약이 취소되거나 축소되거나, 납품 지연 등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속 개성공단에 노동자 공급을 늘렸다.

 

사실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5·24 조치는 강도는 셌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한미가 공동으로 압박한 군사적 압력은 오히려 중국을 자극해 중국의 대북 접근을 높이는 역효과를 냈다. 북한과 중국은 두 차례 정상 회담을 가졌고, 창지투(장춘-길림-도문) 개발 계획에 따른 북-중 간 경제 협력이 긴밀해지는 효과를 낳았다. 북한과 중국은 1330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국경선을 마주 대고 있어서 중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대북 압박과 봉쇄는 실효성을 가질 수가 없는데, 이것이 여러차례 입증되었다.
 
개성공단의 장래는 박근혜-김정은 정상 회담이 언제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전반기인 2015년 말 이전에 성사되면, 개성공단은 이 정부 하에서 상당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정상 회담이 박근혜 정권 후반기로 넘어가면 개성공단은 1단계를 못 벗어난다. 
 
대통령 특사로 평양에 가다
 
노무현 정권 전반부 2년 반 동안 남북 관계가 경색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2005년 6·15 5주년을 기해 내가 평양에 특사로 가서 김정일 위원장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남북 관계가 풀리게 된다.

 

2004년 의욕을 갖고 통일부 장관으로 갔는데 처음부터 시련에 부딪쳤다. 북이 온갖 욕을 해대도 참고 인내하면서 해빙기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물론 그 사이 개성공단을 문 여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기회가 찾아왔다. 2005년 6월 14일 6·15 5주년에 6·15 남측위원회, 북측위원회, 해외위원회 3자가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하기로 했는데, 내가 정부 대표로 참석하게 됐다. 당시 정부 내에서 반대도 있었다. 민간이 주도하는 행사에 정부가 곁다리로 가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점에서 실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남북 관계가 어려운데 민간이 공동 행사를 만들고, 정부 대표가 함께 가서 축하하고 기념함으로써 남북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통일부 장관이 민간 행사에 간다고 해서 남쪽 정부의 자존심을 훼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는 것이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있고, 막혀 있는 상황에서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 해결이 중요하고, 형식은 그 다음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평양에 갔는데, 그걸 계기로 해서 제2의 6·15 시대가 개막된다. 기념행사 기간 중에 김정일 위원장과 5시간 동안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5년에서 가장 중요한 남북의 소통은 2005년 6월 17일 대통령 특사로서 나와 김정일 위원장이 다섯 시간 만난 것이다. 두 시간 반은 배석자가 한 명씩 있었지만 사실상 일대일로 대화한 것이고, 오찬 회동을 하면서 두 시간 반까지 합하면 전부 다섯 시간을 얘기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현안을 다 얘기했다. 충분히 소통을 한 것이다. 북한의 모든 의사 결정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그 한 사람과 남북한 간에 맺혀 있는 거의 모든 사안들을 솔직하게 얘기했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이른바 제2의 6·15 시대다. 그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2005년 9월 19일 베이징 공동성명이었고, 그걸 통해 ‘핵을 포기하겠다, 북미 수교하자, 한반도 평화 체제를 논의하자’는 보따리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만남에서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가 김 위원장에게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는 문제였다. 2000년 6·15 공동선언 마지막 항에 ‘김정일 위원장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그때까지 5년 동안 서울 답방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했다.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으로 보아 서울 답방은 조속한 시일 내에 이루어지기 힘들 것으로 보이니 남측은 이를 고집하지 않겠다. 장소는 위원장께서 알아서 결정하시고, 다만 시기 문제는 6자 회담이 재개된 때로부터 멀지 않은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하다면 9월 이내에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즉답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헤어질 때 귀엣말로 “좋은 소식을 내려 보내겠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과 내가 서서 대화 할 때 귀엣말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갔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도대체 무슨 얘길 나눴느냐고 물었다.
 
그때 김 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작정을 하고 내게 귀엣말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05년 8·15에 서울에 파견한 임동옥 통전부장을 통해서 답을 보내왔다. “정상회담 장소를 제3국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도시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3국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나 이르쿠츠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건 안 된다고 했다. 개성이든 금강산이든 백두산이든 평양이든 어디라도 좋으나 반드시 한반도 내여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과거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이르쿠츠크 정상회담 제안을 북이 했던 적이 있었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유발할 수도 있고 남북이 만나는데 강대국이 후견인 노릇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기 문제는 평양에서 제안한 대로 내가 9월 개최를 강조했다. 당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이 막 베이징에서 재개돼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이를 추동할 힘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북한이 시기 문제는 6자 회담이 진행되는 추이를 보고 잡자며 꼬리를 뺐다. 미국이 진정으로 적대시 정책을 포기할 의사 있는지 확인해보고 결정하려는 속내였던 것 같다. 그 점이 못내 아쉽다. 그때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더라면 한반도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지나치게 미국을 두려워한다.

 

사실 2000년도에도 한반도 정세가 급물살을 탔을 때 북이 결정적으로 실기를 했다. 2000년 5월에 북-중 정상회담, 6월에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7월에 북-러 정상회담. 여기까진 빠르게 왔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인 미국과의 소통이 지체된다. 바로 8월 늦어도 9월에는 북-미 대화와 정상회담 추진으로 갔으면 한반도 냉전 해체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을 텐데, 역사의 신이 아직 한민족에게 연단의 시간을 더 주고 계신 것 아닌가 싶다.

 

물론 그 뒤에도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진행되긴 했다. 2000년 10월에 북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군복 차림으로 백악관에 가서 클린턴 대통령이랑 대화하고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하게 된다. 조명록 차수의 백악관 군복 연출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미국 관리들 가운데 당황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군복 연출은 김정일 뒤에 있는 북한의 당.군 일체성을 과시한 것이었다. 조명록 차수가 클린턴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하고, 바로 열흘 뒤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사실상 미사일 문제를 타결지음으로써 북-미 정상회담은 초읽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평양에 온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김정일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 이로 인해 우리가 군사 동맹을 잃은 지 10년이 됐소. 우리가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은 꼭 외화를 벌기 위한 것만은 아니오. 우리는 자위 프로그램의 일부로 우리 군을 무장시키기 위한 것이오. 대결이 없으면 무기도 의미가 없소. 미사일은 지금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당시 미국 관리들은 클린턴-김정일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초안까지 써놓았었다.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다 정상적인 관계 발전은 쌍방 국민의 이해에 부합하며, 한반도 및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의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에 이바지할 것이다. 양국 지도자는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나 비적대적 관계를 건설하기로 한 공약을 재확인한다.”
 
이렇게 됐다면 그 후 1차 핵실험, 2차 핵실험, 3차 핵실험도 없었을 것이고, 네 차례의 로켓 발사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냉전 구조는 해체되고 지금쯤 아마 지각 변동의 결과로 한반도가 천지개벽처럼 변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주일 뒤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역사는 또 방향을 틀어버렸다. 조지 부시 후보가 플로리다 개표에서 537표 차이로 엘 고어를 제치고 미국 제43대 대통령이 되었다.

 

만약 부시가 안 되고 민주당 엘 고어 후보가 당선돼 예정대로 클린턴-김정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더라면 한반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허망한 일이지만 가정해보면 그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북한도 꾸물꾸물하다가 실기한 것만은 분명하다.
 
다시 2005년 얘기로 돌아와서 내가 평양에 특사로 갔던 당시는 남북 관계뿐만이 아니라 북미 대화나 6자 회담도 1년 넘게 중단돼 있었다. 북미 대화는 부시 정권 들어서고는 한 번도 없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북을 ‘악의 축’이니 ‘공포의 전진기지’, ‘김정일 정권교체’니 해서 철저하게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린턴 정부 때 북미 정상회담 직전까지 갔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었다. ‘클린턴 때 한 것은 죄다 틀렸다’는 이른바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 서두에서 꺼낸 말이 “국가 간 신뢰 쌓기에는 지도자 간의 존중과 예의가 중요한데, 얼마 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Mr. 김정일이라고 불렀다. 영어에서 미스터는 존칭 아니냐. 부시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존중한다는 뜻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 위원장께서도 부시 대통령을 예컨대 부시 대통령 각하라고 부른다면 서로 좋은 신호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우리를 존중하고 인정한다면 내가 각하라고 못 부를 이유도 없지요. 부시 대통령 각하!”라고 화답했다. 나는 나름대로 북한과 미국 사이를 좋게 하느라고 애를 쓴 것이다.
 
사실 핵심 중의 핵심이 북-미 간 불신과 적대다. 미국은 북한을 못 믿을 존재라고 보는 것이고 북한 또한 미국을 못 믿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내가 거듭 강조한 것이 “미국과는 우리가 친하지 않으냐. 우리를 활용하시오. 우리가 도와주겠소”라고 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 대사에 대한 얘기도 꺼냈다. “최근에 서울 주재 미국 대사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로 영전했고 동시에 6자 회담 미국 대표가 됐는데, 내가 겪어본 바로는 굉장히 솔직한 인물이고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능력과 야심을 가졌다. 특히 그는 코소보 분쟁을 해결한 경력도 갖고 있는데, 이번에 어떻게든 북핵 문제를 타결해 보려고 자기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것이다. 그를 활용하시오”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온 뒤 아직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힐 대사에게 내가 김 위원장에게 전한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고, 당신이야말로 한반도 냉전을 걷어낼 적임자라고 추켜주기도 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다섯 시간 동안 만나고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모든 얘기를 다 했는데, 김정일 위원장은 현안에 정통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보좌관을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말이 통한다는 느낌이었다. 상대방의 말이 듣기에 이치에 맞다, 사리에 합당하다고 하면 즉석에서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하고 의사 결정을 내린다. 북한에는 단 한 사람의 정책 결정자가 있고, 바로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의 답변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었다. 예를 들면 이산가족의 화상 상봉을 내가 제안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좋은 제안입니다. 흥분되는 제안입니다. 이번 8·15부터 합시다”라고 해서 실제 시행이 되었다.
 
그런데 한편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3년 뒤에 북경 올림픽이 있는데, 남북 공동 응원단을 기차로 북경에 보냅시다”라고 제안했더니, 김 위원장이 ‘그건 안 된다’는 것이다. “혁명의 심장부 수도 평양을 남쪽 주민들이 통과하려면 북남 관계가 지금보다 몇 단계 더 발전해야 합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실제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북경까지 기차로 올림픽 남북 공동 응원단을 보내는 문제는 2년 뒤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에서 합의가 됐다. 김 위원장 말대로 그 사이에 남북 관계가 몇 단계 발전한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전임자의 업적을 부정하지 않고 약속대로 올림픽 응원단이 철도로 서울-평양-북경을 왕복하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금강산 관광과 관련해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금강산 관광이 생각보다 지지부진하다”고 얘기를 하길래, 나는 “금강산 관광을 활성화하려고 우리도 노력을 하고 있는데, 좋은 방법은 개인별 승용차로 관광을 하게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굉장히 관광객이 많이 늘어날 겁니다”라고 부연했다. 그러자 ‘좋습니다’ 하고 허락할 태세였는데, 옆에 있는 통일전선부장 임동옥이 벌떡 일어나서 “장군님 그건 안 됩니다”라고 했다. 환경 훼손이 심하다는 얘기였다. 주차장 만들어야 하고, 환경오염과 자연 훼손을 들어서 승용차 관광은 안 된다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평소 부하들로부터 ‘우리 장군님은 통이 큰 지도자’라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회담 말미에 김 위원장에게 “우리 남과 북이 통 크게 한번 합시다”라고 제안을 했고, 김 위원장은 “좋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그 뒤로 남과 북은 숨 가쁘게 통 큰 조치들이 진행됐다.

 

내가 서울에 돌아온 뒤, 첫 번째 통 큰 조치로 제주해협을 북한 선박이 통과하는 것을 허용했다. 당시 해군과 국방부 측은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으나 북의 최고 지도자와 약속한 사항을 뒤로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NSC 위원장으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밀어붙여 2005년 8월부터 북한 선박에 대한 제주해협 통항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5년 뒤인 2010년 5윌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서 5·24 조치로 중단이 됐다.

 

통 큰 조치 이후 5년 동안 북쪽 배가 제주해협을 300척이 지나갔다. 상선이 일주일에 1척 꼴로 지나갔다. 동시에 남쪽 배도 원산 앞바다를 지나서 직선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거나, 해주 앞바다를 지나서 중국 대련으로 갈 때도 직선으로 갔다. 이전에는 원산이나 해주 앞을 지나가지 못 하고 공해상으로 나가서 기역자나 니은자로 올라갔다. 그렇게 북쪽 바다 직항로로 5년 동안 남쪽 배가 8000척이 지나갔다. 누가 더 이익인가.

 

우리가 제주해협 통항을 허용하는 통 큰 조치를 취하자 북쪽 또한 통 큰 조치를 취하고 나왔다. 2005년 8.15에 해방 60주년을 기념해 북쪽 대표단이 서울에 와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헌화 참배했다. 6.25 이후 최초의 일이다. 동작동 국립묘지는 6.25 전몰장병을 기리는 묘지다. 거기에 와서 헌화, 참배를 했다는 것은 이제 6.25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한 단원을 통째로 넘기자는 것이었다. 6.25를 넘어서서 새로운 관계로 가자는 구체적인 의사표시였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북한은 1년여 만에 6자 회담에 복귀했다.
 
사상 최초 김정일 위원장과 '핵 문제 토론'
 
김정일 위원장과 대화에서 또 하나의 핵심 주제는 바로 핵 문제였다. 2003년 2차 핵 위기가 발생한 이래 열 몇 차례 남북장관급 회담이 열렸지만, 그때마다 실랑이를 벌인 게 핵 문제다. 우리는 장관급 회담 발표문에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명기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은 고집스럽게 핵 문제는 남북이 논의하고 합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북한 주장에는 문제가 많지만, 예컨대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당사자로서 이를 깬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북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북 간에 핵 문제를 놓고 실질적인 토론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2005년 6월 17일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가 더욱 크다. 처음으로 남쪽의 고위 당국자가 북쪽의 최고위 지도자와 핵 문제를 놓고 직접 토론을 했기 때문이다. 핵 문제와 관련해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고 반론도 하고 설득했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는 핵 문제가 현안이 아니었다. 이슈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 제기가 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이미 합의된 2007년 2·13 합의가 있었다. 그건 미국 강경파가 찢어버렸던 9·19 합의 문서를 다시 살려내자는 합의였는데, 이걸 충실히 이행해가자는 원칙적인 대화가 있었다.

 

대통령 특사로서 첫 번째 목표가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였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나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나는 김 위원장에게 첫째 “6자 회담 틀은 북에 불리하지 않다”는 걸 역설했다. 본래 부시 정부가 6자 틀을 짤 때는 5:1, 즉 북한 빼고 한-미-중-러-일 다섯이 공조해서 북핵 폐기를 밀어붙이겠다는 의도였지만 실제 진행 과정에서는 1:4:1, 북한과 미국이 대척점에 있고 나머지 넷은 중간 지점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예도 들었다. 만일 1994년 제네바 합의가 북과 미국 간의 양자 합의가 아니라 6자 간 합의였다면 그렇게 쉽게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듣고 있던 김 위원장의 표정에서 수긍하는 듯한 눈빛을 느꼈다.


두 번째는 “북이 그토록 원하는 북미 관계 정상화를 우리가 도울 테니 우리를 활용하라”고 말했다. 미국과는 우리가 가깝다. 우리는 북이 핵을 포기할 의사를 명확히 한다면 미국에 대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용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하이라이트는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답변을 받아낸 것이다. 이는 그때 그 자리에서 처음 나왔고 그 뒤 북핵 협상에서도 하나의 기준선이 되었다.
 
하지만 쉽게 나온 발언은 아니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북의 궁극적 목표가 핵 보유 국가가 되는 것입니까?” 그러자 김 위원장의 답이 “그렇지 않소. 초강대국 미국이 우리를 적대시하면서 우리를 압살하려고 하기 때문에 핵을 개발하는 것이지 미국이 우리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소”였다.

 

내가 또 물었다. “그러나 전 세계인들은 김 위원장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반론에 대해 김 위원장은 완강하게 답했다. “그렇지 않소. 미국이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핵을 한 알도, 한 알도 가질 필요가 없소. 와서 다 보라고 하겠소.” 그는 핵탄두를 알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평양 오기 전에 국회에 나갔는데 야당 의원들이 그랬다. 통일부 장관이 순진하다고. 김정일은 절대로 핵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이때 김 위원장 얼굴이 상기되는 듯했다. 그러더니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오.” 이렇게 답변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내 기억에 북핵 위기가 발생한 이후 십수 년 동안 북한 당국이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언이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핵에 매달리는 이유가 자신들의 생존과 체제 안전 보장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를 최상급 어법으로 강조한 것이었다. 김 주석은 북에서는 신과 동급 아닌가.
 
하지만 김 주석의 유훈이라고까지 말을 했는데, 6자 회담에 복귀한다는 말은 끝끝내 안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직전에 워싱턴에서 열렸던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 대통령이 “한국인들은 내가 북한 핵 문제를 전쟁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북핵 문제를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다”라고 한 말을 거듭 인용하면서 “지금이야말로 6자 회담에 돌아올 적기”라고 강조했다.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반박하기를 “부시는 그렇게 말했는지 몰라도 정상회담 이후에도 그 밑에 럼스펠드 국방장관이라는 자가 김정일은 국민을 굶겨 죽이는 독재자라고 비난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럼스펠드 장관이 그런 말을 한 것을 나도 기억하는데 그것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 전의 일입니다” 하고 정정을 해줬다. 그러자 김 위원장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홱 돌렸다. 위원장 오른쪽에 앉아 있던 임동옥 통전부장이 벌떡 일어서더니 “넷, 장군님” 하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김 위원장이 “가서 강석주한테 날짜를 확인해보라우” 하고 지시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때 김 위원장의 머릿속 안테나는 모조리 태평양 건너 워싱턴으로 향하고 있구나 싶었다. 미국 고위 관리들이 자신과 북한에 대해 한 말들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0분쯤 지난 뒤 임동옥 부장이 자리로 돌아오더니 “장군님 말씀이 맞답니다.” 이러는 것이다. 내가 거듭 말했다. “한 달 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안보 포럼(ARF)에 참석한 럼스펠드 장관이 한 얘긴데, 그건 정상회담 있기 전입니다. 다시 확인해보라고 하십시오”라고.

 

내가 계속 물고 늘어지는데도 6자 회담에 돌아온단 말을 안 하길래 일단 다른 주제로 옮겨 갔다. 그러다가 회담 끝 무렵에 나는 다시 말했다. “특사로 평양에 왔다가 이대로는 못 돌아갑니다. 어렵게 온 길인데 선물이라도 하나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온 세계가 김 위원장의 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6자 회담에 돌아갈 때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못 이긴 듯 대답이 돌아왔다. “만일 미국이 우리를 피고처럼 대하지 않고 동등한 자격에서 우리를 대하고 인정한다면 다음 달이라도 못 돌아갈 이유가 없소.” 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됐다, 이만하면 6자 회담은 돌릴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어깨가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다.
 
6자회담 재개까지 '긴박했던 외교전'
 
그리고 다음 달인 7월 말 6자 회담이 재개되고, 마침내 9·19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 과정까지의 얘기는 소설 한 권 분량은 될 정도다.

 

평양에서 돌아온 뒤 내가 집중한 것은 미국에게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하고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워싱턴으로 가기 전에 뉴욕에 들러 미 공화당 정부의 대외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키신저 박사를 먼저 만났다. 키신저는 1970년대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으로서 중국의 문호 개방을 이끌어냈던 국제정치의 대가다. 그는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외교를 통한 해법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강경파 네오콘이 추구하던 북한 정권 교체론이 비현실적이라고 보고 북한에게 핵 포기에 따른 체제 보장과 경제적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북핵 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일본과 한국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고 북한은 핵 물질 확산에 나설 위험이 있다고 걱정했다. 그리고 북한을 향해서도 자신이 속한 공화당 정권이 중국과 관계 개선을 이루었던 경험에 비춰 오히려 김정일이 부시와 협상하는 편이 쉬울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키신저와는 몇 달 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어 구면이었다. 그는 내가 워싱턴 당국자들보다 자신에게 먼저 김정일 위원장과의 대화 내용을 설명해준 것을 원로로서 자신을 대접해준 것으로 여겨 굉장히 기분 좋아 했다. 김 위원장이 진정으로 미국과 관계 개선을 희망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는 자신이 라이스 국무장관과 해들리 안보 보좌관 등에게 미리 잘 얘기해놓을 테니, 내가 워싱턴에 가서 그들을 만나면 잘해줄 거라고 격려해 주었다.

 

키신저 박사와는 일 년쯤 뒤 뉴욕에서 또 만났다. 2006년 가을 1차 핵 실험 직후였다. 당시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지만 내 스스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의병을 자처하고 미국으로 중국으로 뛰어다닌 적이 있다. 그때는 세계가 북한 핵 실험으로 충격을 받고 이제 협상에 의한 핵 폐기는 불가능하다는 비관론에 빠져 있을 때였다. 키신저는 지금이야말로 외교가 작동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에 비하면 미국은 얼마나 크고 강한가. 거기다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까지 힘을 합쳐 북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면 과연 외교란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라고 반문했다.

 

나는 그때 키신저의 말을 듣고 나서 ‘부시 정부가 어쩌면 기존 강경 정책을 접고 외교적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있겠구나’라고 짐작했다. 키신저의 영향력이나 북한 핵 실험과 함께 중간선거에서 참패해 궁지에 몰린 부시 대통령의 처지로 봐서 키신저 박사의 조언 외에 달리 취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핵 실험 몇 달 뒤 베를린에서 미국과 북한이 부시 정권 등장 이래 최초로 공식적인 양자 대화를 열었다. 거기서 일 년 반전에 강경파가 찢어버린 2005년 9·19 합의문을 되살려내기로 했다. 결국 부시 정권 8년 중에 앞부분 6년을 허비하고 원점으로 돌아와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강대국 강경파에 우리의 운명이 휘둘린 비극적인 기간이다.
 
다시 2005년도 얘기로 돌아가서, 나는 키신저 박사와 만나고 난 뒤 뉴욕을 떠나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북한 문제를 포함해 부시 정부 내의 대외 정책을 좌지우지하던 네오콘 수장 체니 부통령을 만났다.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은 ‘웨스트 윙’이라고 불리는데 그곳의 한쪽 구석에 있는 부통령실은 진짜 조그마했다. 서너 평쯤 될까. 체니 부통령과 나 그리고 홍석현 주미대사와 크리스토퍼 힐 6자 회담 대표 또 통역자 이렇게 둘러앉았는데 방이 꽉 찼다. 그런데 방은 작아도 체니는 힘이 셌다. 1970년대 포드 대통령 때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고 시니어 부시 때 국방장관을 지낸 인물인 체니는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였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초 미국 특파원일 때 한 국제회의장에서 당시 국방장관이던 체니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가 차가운 보수라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체니는 그림자처럼 일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처럼 태도가 조용하고 침착했지만 속으로는 과격한 보수주의자였다.

 

체니 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핵 폐기를 위한 6자 회담 협상에 복귀할 의사를 밝혔다”는 내 얘기를 쭉 듣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Do you believe him?" 그 사람을 믿느냐는 말인데, 거의 힐난 수준이었다. 체니 부통령은 북한 문제와 관련해 북한 정권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따라서 북핵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김정일과 마주 앉아 협상을 하라고 권유했으니 씨도 안 먹히는 소리였던 셈이다. 

 
옆에 있던 힐 차관보의 얼굴이 굳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힐 차관보는 이제 막 동아태 차관보 겸 6자 회담 미국 대표로 나서서 북한과 협상에서 뭔가를 이루어보려는 의욕이 강해 보였는데,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부시 정권의 실질적인 대외 정책사령탑인 체니로부터 나랑 똑같이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질문을 받은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김정일이 말한 것을 믿고 안 믿고가 핵심이 아니고, 그가 말한 것을 실천하도록 묶어내는 것이 우리가 할 일 아닙니까. 다음 달에 나온다는데 6자 회담에 나오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네오콘들은 사실 북한과 협상하는 것을 혐오했기 때문에 6자 회담 재개에 관심이 없었다. 체니는 “그가 다음 달에 자신이 말한 대로 6자 회담에 나오면 그가 말한 것을 내가 참고하지요” 하고 아주 거만하게 얘기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7월이 됐는데 북이 안 나왔다. 속이 탔다. 나는 북에 편지를 보냈다. “김정일 위원장이 다음 달에라도 나온다고 했는데, 7월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답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7월 31일과 8월 1일의 차이를 아느냐”고 팩스를 보냈다. 국제 사회는 7월 31일에 나오면 김 위원장이 말을 지킨 게 되고, 하루 지나면 안 지킨 것이 된다. 이런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상기시켰다. 북한은 그런 관념이 약해서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기왕 나올 바에는 7월에 나와야 합니다. 당신들 위원장 말을 내가 미국에도 전했고, 다했는데….” 그런데 북한이 진짜 7월 말에 나온다고 발표를 했다. 남북 관계가 이렇게 피를 말린다.
 
마침내 중단된 지 1년 1개월 만에 2005년 7월 26일 베이징에서 6자 회담이 열렸다. 8월 7일까지 1단계 회담을 하고 9월 13일부터 2단계 회담이 열렸다. 이 기간 중에 나는 남북 장관급 회담 참석차 평양에 가서 북측에 핵 포기에 관한 최종 결심을 촉구했고,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에 가서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 협상 타결을 위해 미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줄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2005년 9월 19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제4차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 위한 ‘9.19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내 강경파의 방해 공작에 뒤집히긴 했어도 6자 회담의 9·19 합의문은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표준 문서가 될 것이 확실하다. 9·19 합의문에 ‘북핵 포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북미 간 적대 관계 청산과 관계 정상화, 정전 체제를 항구적인 평화 체제로 바꾸자는 원칙까지 담았으니 이건 자화자찬이긴 하지만 한국 외교사의 금자탑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운명을 다룬 국제 협상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낸 적이 있었던가. 현대사의 비극이지만 주변 강대국들은 고비고비마다 한국인의 목소리는 배제한 채 자기들끼리 모여 마음대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고 자기들끼리 이익을 나눠 가졌다. 다시는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북핵, 9.19로 돌아는 게 가장 빠른 해법이다
 
1953년 7.27과 더불어 형성된 정전체제는 전후 60년 한국의 정치, 군사, 외교, 사회, 문화를 규율하는 근본조건이었다. 동서고금에 전쟁이 끝난 지 60여년이 넘도록 뒤처리를 하지 못한 전쟁은 없었다. 왜 한반도에서만 휴전 60년이 지나도록, 탈냉전 이십여 년이 지나도록 불안정한 정전체제가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는 외부요인과 내부요인이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정전체제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의 국익과 충돌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현상 유지는 그들에게 나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남과 북의 역대 정치 세력들은 분단과 정전체제 아래서 적대적으로 공존했다. 남은 반공과 반북으로 권위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북은 반미와 반남을 축으로 3대 세습체제를 구축해 왔다. 양측의 기득권 세력에게 분단과 정전체제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체제유지의 강력한 기반이었다.
 
탈냉전의 세상에서 홀로 남아 동족간에 적대와 대결을 지속하고 있는 모습이 이성적 한국인이라면 부끄러울 것이다. 분단을 넘기 위해서는 우선 정전 체제를 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6.15와 10.4를 통해 남과 북이 적대와 증오를 넘고,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새롭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바꾸어가자는 원칙에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실천에 이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북은 그 사이 여려 차례의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상황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정녕 핵 문제에 답은 없는가?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9.19는 타결과 거의 동시에 불행하게도 북한과의 협상을 혐오하는 미국 내 강경파에 의해 폐기되었으나, 결국 이것 말고는 길이 없다는 공통 인식 아래 되살아난 것이 또 9.19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최고 지도자도 9.19로 돌아가 한반도를 비핵화 하자고 의견을 모은 바 있다.
 
9.19의 핵심은 세 가지다. 하나, 북은 핵을 포기하고, 둘, 미국은 북과의 적대를 청산하고 수교하며, 셋,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바꾼다. 여기에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3대과제가 다 들어 있는 셈이다. 9.19는 한국 외교사에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스스로 주도한 드문 예다.

 

나는 9.19 합의 석 달 전에 평양에 특사로 갔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5시간 담판을 통해 6자회담 복귀와 핵 포기를 설득하고 대신 미국이 끝내 북한에 경수로 공급을 거부할 경우 남측이 전기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 남국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9.19다.
 
이제 남은 것은 실천이다.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지난 100년 한반도와 관련한 여러 개의 국제조약에서 주변 열강들은 한국의 참여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한국 문제를 논의하고 이익을 나누어왔다.
 
지금은 다르다.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 조수석에 북한을 앉히고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의 고속도로 위로 올라가야 한다. 주변 강대국들을 뒷좌석에 태우고 협력을 구하면서 같이 가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분단되었다가 통일을 이룩한 나라로 베트남과 독일이 있다. 베트남은 무력과 전쟁으로 통일을 이뤘고, 독일은 동독이 백기를 들고 투항한 흡수 통일이었다.

 

과연 한반도 통일은 어떤 모습이 될까? 독일형 통일과 베트남형 통일 둘 다 우리에게는 적용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통일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체 모델이 생긴 것이다. 개성공단 모델이다. 개성공단은 국내 또는 해외의 다른 산업공단과는 성격이나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경제적 가치와 군사 안보적 가치를 뛰어넘는다. 개성공단은 손에 잡히는 한국형 통일 방안이기 때문이다. 남의 자본과 기술, 북의 노동력과 토지가 결합하니 국제적 경쟁력이 생겼고, 성장동력이 꺼져가는 우리의 가장 확실한 돌파구이자 블루오션이라는 게 증명되고 있다.
 
같은 꿈을 꾸면 그 꿈은 현실이 된다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 후 2개월 뒤인 2005년 8월 14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7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8.15 민족대축전이 열렸다. 그날 개막식에는 서울을 방문한 김기남 단장, 임동옥 통전부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이 자리를 함께 했다. 나는 남측 당국대표단의 단장을 맡아 북측 인사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축사 연설을 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다시는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희생물이 되고 눈물을 흘리는 약자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화를 이루고 통일을 이루는, 당당한 자존의 나라, 자주의 나라, 통일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분단과 정전상태를 청산하고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구상에 냉전의 외로운 섬으로 홀로 남은 한반도의 운명을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손으로 개척해서 이 땅에서 영원히 전쟁의 가능성을 종식시키고 영구평화와 공동번영의 토대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훗날 정말 한반도가 경제 공동체를 거쳐서 통일로 가고 있을 때 개성공단이 결정적인 역할은 한다면, 그래서 개성공단을 설계도 상태에서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든 장본인이 ‘통일부 장관 정동영’이었다고 기록이 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큰 보람과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정동영 개인의 보람과 영광이 결코 아니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8천만 민족 전체의 보람이자 후손들에게 남겨줄 빛나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개성공단은 정치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이다”고 말하곤 한다.
 
부산역과 광주역에서 파리행 열차표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비단 나만의 소원은 아닐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공동 번영,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건설은 우리 시대 최고의 과제이다. 또한 우리가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미래상이다. 그 원대한 꿈이 있기에 우리는 대륙으로 가는 길을 멈출 수 없다. 더 많은 사람이 같은 꿈을 꾸면 그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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