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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정동영, 새정치련, 가치와 노선 실종 … 권력투쟁만 남았다

  

 

새정치련, 가치와 노선 실종 … 권력투쟁만 남은 난파선 됐다

 

2014.10.04  중앙일보

 

이정민이 만난 사람 정동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그의 ‘정치 스펙’은 화려하다. 3선 의원과 장관(통일부)을 지냈다. 노무현 정권의 2인자로 불렸다. 40석짜리 당을 원내 과반이 넘는 152석으로 불리는 ‘대박’을 터뜨린 집권당(열린우리당)의 대주주였다. 내친김에 대선에도 도전했다. 그러나 스폿라이트는 여기까지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드리워진 그림자는 좀처럼 걷히지 않고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 불출마 후엔 여의도 정치의 공식 석상에서도 거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 정동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의 얘기다.

 정 고문을 인터뷰한 건 요즘 새정치연합 내 사정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다. 강경파 지도부가 또 다른 강경파에 밀려나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양상으로 흐르고 있는 사태를, 한때 대통령을 꿈꿨고 당 대표(열린우리당 의장)를 지낸 정 고문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새정치연합을 “난파선”에 비유했다. “가치와 노선은 실종되고 권력투쟁만 남았다”고 힐난했다. “특정 계파의 패권주의가 집권을 가로막아 보수 장기집권을 불러올 것”이라며 친노 강경파에 각을 세웠다. 인터뷰가 이뤄진 건 2일 오후, 몇 시간 앞서 세월호법 협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박영선 원내대표가 물러났다.

정동영 고문은 7·30 순천-곡성 보궐선거 패배는 “공천 파행, 지리멸렬한 당의 모습을 보면서 당원들이 저항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 세월호법 3차 협상안을 비판했는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 16일 아침으로 돌아가보자. 그때 여야, 진보-보수, 친정부-반정부가 어디 있었나. 온 국민이 생명과 안전이 중요하다는 데 일치했고 완전히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데 공감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뭔가. 특검 후보 추천에 유족이 참여해야 한다, 안 된다를 놓고 다투고 있다. 본질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이 바닥을 드러낸 거다. 여당, 야당, 청와대 3자가 모두 패자다.”

 - 합의안을 “야당판 참사”라고 했다.

 “협상안 통과 후 여당 지도부가 활짝 웃는 모습이 잡혔다. 피상적으로 보면 세월호 참사에 정부·여당의 부담이 더 크지 야당의 부담이 더 큰가. 그런데 왜 야당이 망가지나. 야당이 역할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한 결과가 됐다. 야당이 실타래를 꼬이게 만든 것 아닌가. 야당이 완전히 난파선이 됐다.”

 - 리더십의 문제인가.

 “2007년 대선 패배 후 당이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데 근본적 문제가 있다. 지난 7년 동안 평균 경제성장률이 2.9%다. 실질소득이 감소했고 중산층이 줄어들었다. 야당이 잘하기만 하면 다시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거다. 그런데 야당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 왜 그렇다고 보나.

 “나는 누구이며, 누구를 대표하는가 이게 뚜렷하지 않아서다.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해 확실한 신념체계를 못 갖고 있다. 야당의 역할은 두 가지다. 여당이 잘못할 때 확실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반대자가 돼야 한다. 또 하나는 대안자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당은 두 가지 역할에 다 미달이다. 제대로 된 야당 노릇을 못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재벌·대기업·부자 등 기득권세력을 대표한다. 반면 숫자는 많은데 목소리 약한 사람들, 850만 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자들을 대변하는 세력이 없다.”

 - 중도노선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중도니 중도보수니 진보니 하는 건 공허한 이야기다. 우리 당은 노선과 가치에 대한 논쟁을 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당은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말해왔고 그게 중도노선이라고 했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어떻게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한가. 중도니 중도진보니 하는 논쟁 말고, 구체적인 세금논쟁 같은 걸 해야 한다. 담뱃세·주민세 인상에 반대하는 건 쉽다. 대안을 내놔야 한다. 예를 들면 1970년대 교육세, 80년대 농어촌특별세를 붙였던 것처럼 소득세·법인세의 일정 세율에 사회복지세 같은 특수목적세를 붙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그 세금으로 건강보험·무상보육에 쓰면 혜택이 골고루 미칠 수 있다.”

 - 야당은 계파 투쟁에만 골몰하고 있다.

 “정당의 척추라 할 수 있는 노선과 가치가 실종되니 권력투쟁만 남는 것이다. 계파투쟁만 난무한다. 국민들은 ‘나에게 뭘 해줄 수 있느냐, 내 삶을 어떻게 개선해줄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데 권력투쟁만 난무하니 넌더리를 내는 것이다. 얼마 전 보문동에서 왔다는 아주머니가 내 팔을 잡고선 ‘민주당이 이게 무슨 꼴이냐’며 펑펑 우는 걸 보고 가슴이 답답했다. 자기는 평생 죽도록 일하고 고생만 했는데, 지금도 못산다. 세상은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다. 우리가 믿을 데가 어디 있느냐며 우는데 할 말이 없더라. 이런 사람들한테 희망을 열어줄 수 있어야 한다.”

 - ‘문희상 비대위’를 계파 나눠먹기라고 비난했는데.

 “정당의 당원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새누리당이 부러워 보였다. 김무성 대표가 김문수 전 지사를 혁신위원장 시키는 걸 보면서 우리 당은 그게 가능하겠는가 생각했다. 우리 당엔 그렇게 통 큰 지도자가 없다. 자기 계파에 함몰된 인물들만 득시글하다. 내가 ‘계파 해체를 결의하자’고 했다. 김원기 의장이 좋은 제안이라고 찬성했고 문재인 의원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계파 극복’을 주문했는데 문희상 위원장이 ‘계파 연합체’라고 받았다. 대놓고 ‘우리 당은 계파 연합체요’라고 한 거다.”

 - 친노계의 패권주의가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특정 계파의 당권 장악 또는 특정 계파의 독과점은 필시 당내 분열과 갈등을 촉발한다. 그것은 정권 교체를 무산시켜 결국 보수 장기집권, 새누리당 장기집권 시대를 열게 된다.”

 - 스스로 친노라고 생각하나.

  “노무현 정부 각료로 일했으니 책임이 있다. 그러나 지금 친노니 비노니 하는 게 노무현 대통령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친김대중, 비김대중 없지 않나. 김대중 정신이 공유자산이듯 노무현 정신도 공유자산이다. 이것을 공유하는 것은 노선과 가치를 공유하는 것인데. 문제는 특정 계파가 패권적 권력을 추구하는 데 있다.”

 - 모바일 투표 논란으로 시끄럽다.

 “2010년 10월 3일 전당대회에서 내가 당원주권을 발의했다. 당헌(1조2항)에 ‘민주당의 당권은 당원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당원으로부터 나온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후 이해찬·문재인 의원, 문성근씨 등 혁신통합계와 합쳐지면서 이 조항이 삭제되고 모바일 투표가 채택됐다. 한명숙 대표, 이해찬 대표, 문재인 대선 후보의 승리가 다 모바일 투표에서 온 거다. 대선 패배 후 폐기했는데 다시 문희상·문재인·이해찬 의원이 모바일 투표를 하자고 하는 건 특정 계파의 당권 장악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가면 정권교체는 물 건너 간다.”

 - 정치 입문한 지 19년이 됐다. ‘정동영 정치’를 평가한다면.

 “미숙했다. 당 만드는 데 앞장도 서보고 부숴도 봤다. 성공도 해봤고 실패도 해봤다. 그러면서 내 신념체계가 단단해졌다.”

 - 아쉬웠던 일은.

 “2007년 대선 패배다. 용산참사 후 골목미사에 갔는데 신부님이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조금만 잘했으면 이분들이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주범이구나,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용산에 갔고 노동위원회로 옮겨 비정규직·노동자 문제를 알게 됐다. 그때 느낀 것은 지난 십수 년 여의도 정치하면서 땅바닥에서 30㎝ 떨어진 공중을 걸으며 정치했구나, 내 발이 땅이 안 붙어 있었구나 하는 반성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팍팍한데 내가 그들의 고통과 눈물을 얼마나 대변했는가 하는 걸 반성했다. 거기에 답이 있고 우리 당의 살 길이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것은 좌도 우도 아닌 삶의 노선이다.”

 - 잘한 일은 뭐라고 생각하나.

 “2004년 통일부 장관 때 개성공단을 초스피드로 밀어붙였는데 그때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들지 않았으면 지금도 개성공단은 계획으로만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개성공단은 단순히 산업공단이 아니라 한국형 통일방안이다. 2006년 지방선거 때문에 당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당으로 가지 않고 계속 장관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 야당이 된 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벌여 강경파로 비쳐졌다.

 “자유무역엔 찬성하지만 한·미 FTA 협정문에 들어 있는 사법주권, 의회주권, 공공주권을 침해하는 요소에 대해 반대한 거다. 깊은 검토 없이 관료들의 말을 듣고 한·미 FTA를 성급하게 추진한 것은 과오였다.”

 - 당 대표 경선에 나설 건가.

  “지금 얘기할 적절한 시점은 아니다. 우리 당은 국민의 눈높이에선 난파선이다. 어떻게 당을 구해야 할지 근본적 고민을 하고 있다.”

 -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동영 신당설이 나돈다.

  “지역주의는 옳지 않다. 그러나 당밖에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다. 각 분야 전문가·지식인 그룹에서 새정치연합으로 정권교체가 되겠는가 하는 회의론이 많이 나오는 건 사실이다.”

 - 새정치연합이 기사회생할 수 있을까.

 “지역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바꿔야 한다. 지난 총선 때 새누리당이 42%를 득표했다. 국민이 126석을 준 건데 실제론 152석을 가져갔다. 민주당은 108석(36%) 가져야 하는데 실제 의석은 128석이다. 양당이 담합해 46석을 더 가져간 거다. 주권자인 국민이 준 것만큼 의석을 가져갈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 대선의 꿈은 접었나.

 “지금은 대선을 담을 당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 당은 바가지가 깨져 물이 줄줄 샌다. 정권을 담으려면 이 바가지를 바꾸든지 새 바가지를 갖다 놓든지 해야 한다. 새 바가지에 주자가 담겼을 때 정권 획득으로 갈 수 있다. 지금 이 당에 후보를 얹어봐야 정부가 되겠나.”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사진=김상선 기자


[S BOX] 6·25 전쟁 끝난 날 태어나 … “한반도 통일에 에너지 쏟겠다”

 

2005년 김정일 위원장이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동영 고문은 1953년 7월 27일 낮 12시에 태어났다.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판문점에서 6·25 전쟁의 휴전에 서명한 날이다. 그는 “6·25 전쟁이 끝난 날 이 세상에 나왔는데 아직도 휴전체제 속에 살고 있다”며 “내적으론 복지국가,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길로 가는 데 정치적 에너지를 쏟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회의원 30여 명이 참여하고 있는 ‘대륙으로 가는 길’이란 단체를 이끌고 있다.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모임으로 강연·출판과 함께 매년 여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탐방 행사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로로 4500㎞, 75시간을 달리는 이벤트다. 정 고문은 “젊은이들이 통일이라고 하면 감흥이 없는데 대륙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면 가슴을 뛰게 할 수 있다 ”고 강조했다. 이어 “중국과 대만은 남북관계만큼 불안했지만 투자·여행·송금을 자유화하면서 사실상의 경제적 통일을 이뤘다”며 “당초 남북이 합의한 대로 개성공단을 확장하면 남북 교착상태를 풀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