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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정동영, '13척 이순신과 130석 민주당'

[13척 이순신과 130석 민주당]

영화 '명량'을 1,800만 명이 봤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봤을까. 세월호 참사 속에 지도자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 국민이 영웅 이순신을 통해 상처받은 가슴에 위로를 받으러 간 게 아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이순신이 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 같이 던지며 싸우는 이순신이 고독해 보였다.

이순신의 고독 속에는 순하고 착한 백성에 대해 한없는 연민이 들어 있었다. 백성은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쳤던 못난 임금 선조에게 의지할 수 없는 대신 이순신에게 기댔고 위안 받았다.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 불현듯 선조가 당시의 정부 여당이었다면 이순신은 야당 같은 처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위기에서 백성을 구한 역사 속 이순신과 위기에 처한 사회적 약자를 등 진 오늘의 야당은 무엇이 다른가.

당시 이순신은 상황이 절박했고 그의 상황인식은 정확했다. 1597년 7월 20일 파직당한 이순신을 대신해 지휘봉을 쥔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전멸 당했다. 거북선 군단을 포함해 150척이 침몰했다. 겨우 12척이 도망쳤을 뿐이다. 다급한 선조는 이순신을 복직시켰다. 그리고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합류하라고 지시한다.

이순신은 무조건 순종하지 않았다. 이때 나온 말이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는 말이다. 언제 들어도 울림이 큰 말이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수군을 없애면 왜군만 행복해질 뿐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왜군이 가벼이 덤비지 못할 것이라고 임금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독전했다.

이순신은 압도적인 왜적의 세력을 상쇄할만한 유리한 지형과 물길을 찾아 진주에서부터 해남까지 300km 거리를 20여 일에 걸쳐 이동한다. 그리고 마침내 거센 물살이 울음소리를 내는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 진을 쳤다.

지금 제1야당의 상황은 절박하다. 하지만 상황인식은 안이하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당원의 45%가 정권교체가 가능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85%는 야당이 야당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도부는 태평 무사하다. 이유가 뭘까.

현재 야당은 130석의 거대 의석을 가졌다. 하지만 정권교체에 대한 열정보다는 다음 총선 공천이 훨씬 더 큰 관심사로 보인다. 그래서 느긋한 걸까. 비상대책위를 만들면서 계파를 없애라고 했더니 오히려 '우리 당은 계파 연합 자체요'라며 계파성을 노골화했고, 혁신하라고 했더니 비대위가 혁신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순신은 백성을 껴안아 민심을 얻었다. 피난 보따리를 쌌던 백성들은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그를 믿고 보따리를 풀었다. 속속 수군에 자원했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날라 왔다.

이순신은 민심과 군심의 일치 속에 어떻게 이길 것인가 궁리했고, 명량 전투 전날 밤 도인이 꿈에 나타나 필승 전략을 알려 주더라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얼마나 간절하게 몰입했으면 꿈에서까지 지혜를 얻었을까. 다음 날 9월 16일 아침 피난선 100여 척을 병선 뒤에 배치해 왜군을 속였고, 울돌목 급물살 속으로 왜군을 깊숙이 끌고 들어와 13척으로 133척을 격침시켰다.

최근 제1야당은 사회적 약자인 세월호 유족을 버렸다. 세월호법 1,2,3차 합의는 청와대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유족의 요구를 팽개치는 대신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55%는 아직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세월호 피로감을 이야기하는 40%는 새누리당이 잘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월호의 진실을 끝까지 밝히라는 55%는 누가 대표해야 하는가.

세월호에서 1차로 탈출한 사람은 이준석 선장이고, 2차 탈출은 박근혜 대통령이며, 3차 탈출자는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비판은 민심이 야당을 떠나고 있다는 증거다.

야당의 목표는 정권교체다. 정권교체를 이루려면 대안 세력이 돼야 하고 대안이 되려면 정체성이 뚜렷해야 한다.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를 대표하는가'가 정체성이다. 1997년 김대중 총재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란 기치를 들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지금 야당은 중소기업과 서민을 대표하는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고통 받고 있는 850만 비정규직과 300만 영세 자영업자를 위해 19대 국회에서 야당이 해낸 성과와 열매는 무엇이 있는가.

엊그제 전국상인연합회 총회에 갔다. 20년 전 5천 개이던 전통시장이 이제 1,350개 남았고, 대형마트와 백화점에 밀려 고사 위기에 몰린 지 오래다.

10년 전 열린우리당 의장 때 나는 상인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면서 과반수가 되면 '재래시장특별법'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지켰다. 특별법에 따라 지난 10년 동안 3조 원의 재정이 전통시장 현대화에 지원되었다. 2004년 당시 46석짜리 소수 정당이 총선에서 과반수 152석으로 약진할 수 있었던 발판이 재래시장 민심이었다. 야당이 죽지 않고 살려면 민생현장으로 내려가 눈물 흘리는 약자들을 껴안아야 산다.

2014. 10. 20

정 동 영 (前 민주당 대통령 후보)

* 본 글은 새전북신문과 창원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