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창문을 여니 바깥은 아직 깜깜합니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둡지만 곧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오늘은 9월 19일입니다.
4년 전 2005년 9월 19일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한반도 주변 4대 강대국과 남북한이 북경에 모여 ‘9.19합의’를 이룬 것입니다. 부시, 후진타오, 푸틴, 고이즈미, 김정일, 노무현 등 여섯 나라의 정상들을 대신해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9.19 베이징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9.19성명에는 6자회담 참가국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첫째,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폐기한다.
둘째,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수립할 것을 약속한다.
셋째, 북한에 대한 에너지와 경제 지원을 실시한다.
넷째, 한반도의 불안정한 휴전협정체제를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한 논의를 시작한다.
다섯째, 동북아 지역에서 안보협력을 위해 노력한다.
이같은 합의내용은 10년 이상 끌어오던 북한 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유일한 냉전지대인 한반도를 탈냉전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사적 합의였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역할이 결정적이고 주도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표류하고 중단되어 있던 6자회담을 다시 이끌어낸 것도 우리였고 9.19합의가 이루어지도록 뒤에서 밀고 앞에서 이끈 것도 우리였습니다. 한국 현대 외교사에서 언제 우리가 주변 강대국들을 설득하고 이끌어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뜻대로 결정지은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9.19 합의는 눈부신 개가였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2005년 6월 17일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6자 회담 복귀를 설득했고, 다시 워싱턴으로 날아가 당시 실질적인 미국 외교의 사령탑이었던 체니 부통령에게 외교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이룩하자고 역설했던 사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6자회담 참가국 모두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9.19 성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합의가 깨지고 엎어진 사실이 너무나 통분할 따름입니다.
저는 어제 워싱턴의 National Press Club에서 ‘어떻게 북핵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주제로 연설했습니다. 연설의 핵심은 다시 9.19합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과 합의의 실천을 가장 확실하게 담보하는 방법으로 오바마-김정일 정상회담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초 어제 National Press Club의 ‘뉴스메이커’ 초청 연설은 故 김대중 前 대통령이 하기로 되어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닌 김 대통령이 어제 연설을 했더라면 무슨 내용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미국의 조야를 향해 ‘9.19합의로 돌아가자’고 호소했을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지난 7월 13일 폐렴증세로 병원에 입원하던 당일 오전까지도 그 다음날로 예정된 주한 EU상공회의소 초청 연설문 작성을 위해 심혈을 쏟았습니다. 그 연설 원고의 핵심 내용은 바로 ‘9.19합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일찌기 백범선생은 ‘철조망을 베개삼고 누워서라도 기필코 남북분단을 막겠다’고 호소한 바 있습니다. 백범이후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어떤 정치지도자가 故 김대중 前 대통령보다 더 절절하게 남북 분단을 아파하고 그 해소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김 대통령께서는 지난 7월 측근 참모들에게 워싱턴 NPC연설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옆에 있던 김대중 도서관 관장이, 주치의 말을 인용해 건강상 무리가 될 것 같다고 말하자 NPC에서 연설을 하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학생시절 당시 40대 기수였던 김대중 후보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보장론’에 매료되었습니다. 국제 냉전이 한창이었던 1970년 언저리에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고 소련과 중국이 남한을 승인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자는 ‘4대국 보장론’은 파격적이고 신선한 주장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이때부터 용공으로 몰리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지만, 4대국 보장론은 4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주장입니다. 2005년 9.19 성명의 핵심에도 바로 4대국 보장 평화론이 들어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수립하기로 하고 6자가 동북아 지역 안보협력을 하기로 한 약속이 바로 4대국 보장론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저는 어제 NPC 연설에서 미국인들을 향해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한반도 냉전의 해체는 이미 9.19 합의에 들어있고 문제는 실천만 남아 있습니다. 실천을 가장 강력하게 담보할 수 있는 약속의 틀은 정상 회담입니다. 따라서, 기왕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미북 대화와 6자회담이 다시 시작될 전망이라면 시간을 더 끌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시간을 지연하지 말고 가능한 신속하게 오바마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워싱턴에 초청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제 3국에서 두 정상이 만나 한반도의 비핵화와 미국 관계의 정상화를 서로 맞바꾸고 실행을 담보하는 통 큰 거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습니다.
Obama, Kim Jong-Il 이 만나 결단을 내리면 ‘OK 목장’의 결단이 되는 것이겠지요.
지금 워싱턴 내에서는 북한에 대한 여론이 많이 악화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여론이 주도하는 나라입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두 여기자를 데리고 나온 뒤 대북 여론은 더 나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은 원래 그렇게 나쁜 나라라는 악당의 이미지를 오히려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론이라는 것은 ‘조석변(朝夕變)’이기도 합니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모택동 주석을 만나기 전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중국이 국제사회에 나왔을 때, 중국에 대한 여론도 달라졌습니다. 지금 중국에 대한 미국의 여론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여론은 결국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도 자신의 말대로 핵을 포기하고 미국과 새로운 친구가 된다면 미국의 여론도 바뀌게 되겠지요.
역사는 인간이 만들고 위기의 시간에는 지도자의 결단이 역사를 창조합니다.
지금은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결단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를 거래할 의사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지요. 이 가설이 맞다면, 남은 것은 오바마 대통령의 결단입니다. 미국이 대화와 제재를 병행하고 이에 맞서 북한이 대화와 핵 능력 강화를 병행한다고 할 때 미북간의 협상이 열려도 통 큰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너무 많은 장애물들이 출현할 가능성이 큽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해결했듯이, 문제가 얽히고 설켰을 때 그 매듭을 일거에 잘라낼 수 있는 해법은 바로 지도자들의 결단을 통한 통큰 거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9년 전 통 큰 거래가 이루어질 뻔 했습니다. 2000년 5월 김정일 위원장은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주석과 회담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뒤,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났습니다. 그 다음 달 7월에는 열차편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정지작업은 끝났고 2000년 11월 클린턴-김정일 정상회담이 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미국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큰 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뒷날, 클린턴 전 대통령은 “나에게 임기가 1년만 더 있었더라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올해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은 한반도와 관련해 “나는 부시 대통령의 정책이 아니라 클린턴 대통령의 정책을 이어받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또 오바마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적국과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적국을 처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레이건 대통령 때는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끊임없이 대화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같은 생각이 변치 않았다면 9년 전 성사 될 뻔 했던 클린턴-김정일 정상회담을 부활시켜 오바마-김정일 정상회담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달 전 뉴욕타임즈 인터넷 판을 보니 일면 톱 기사에 ‘핵없는 세계’라는 제목으로 한 대학생의 논문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이십 몇 년 전 콜롬비아 대학에 다니던 대학생 오바마가 학교 신문에 기고한 글이었습니다. 취임 후 오바마 대통령이 내건 ‘핵없는 세계’에 대한 비전이 캠페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 대학 시절부터 꿈꾸어온 그의 비전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오바마가 대학생 시절 꿈꾸었던 이상을 대통령이 되어 펼치려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40년 전 DJ가 제시하고 당시 저를 포함한 청년들이 꿈꾸었던 4대국 보장을 통한 한반도의 평화구상이 아직도 우리의 손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한국인들은 냉전의 중독증에 걸려 살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악취 속에 오래 노출되어 있다 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듯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비정상과 부자연스러움 속에 살아왔습니다. 우리나라만 빼고 세계 모든 나라가 냉전의 옷을 벗어 버리고 탈냉전의 시대로 질주한 지 벌써 20년이 되어 갑니다.
역사는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지 못한 민족을 처벌한다고 합니다.
제가 몸으로 느끼기에 우리 민족 앞에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일찍이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우리 눈 앞에 역사의 기회의 문이 조금 열렸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 안으로 뛰어 들었다.”고 썼습니다. 우리에게 역사의 문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탈냉전과 새로운 평화와 기회의 시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역사는 창조적 상상력이 만들어낸다고 저는 믿습니다. “상상하라. 그리고 돌파하라”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8월 19일 클린턴 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무슨 애기를 나누었을까요? 저는 상상해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경청했을 것이고 클린턴 전 대통령이 주로 애기했을 것입니다. 오바마는 이따금 질문을 던졌겠지요. 두 사람의 관심사는 아마도 김정일이라는 인물과 그의 생각에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오바마는 김정일이 과연 핵을 포기할 것인가의 의도와 진정성에 관해 질문했을 것입니다. 클린턴은 아마도 “일 년만 더 임기가 있었더라면 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오래된 아쉬움 속에서 자신이 못다 했던 일을 후배인 오바마가 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요? 클린턴의 얘기를 들은 오바마의 심중과 판단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난 8월 4일 평양,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마주 앉았습니다. 3시간 동안 회담과 오찬에서 두 여기자의 석방 문제는 5분도 안 걸렸을 것입니다. 이미 클린턴이 평양에 내리기 전 결정된 사안이었을테니까요. 두 사람은 첫 만남이었지만 이미 9년 전, 2000년 11월 만날 뻔 했던 사이였습니다. 각각의 관심사는 달랐을 것입니다. 클린턴은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을 확인하고, 김정일 정권과 협상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김정일은 평소대로 이미 94년 북미합의, 2000년 북미 코뮈니케, 2005년 9.19 공동성명을 통해서 일관되게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면 핵을 폐기하고 탄도 미사일도 포기할 것을 약속했지만, 미국이 정권에 따라 대북정책을 바꾸는 바람에 사태가 여기에 이르렀음을 역설했을 것입니다.
왜 김정일은 클린턴을 만나기를 원했을까요? 사실 미국에서는 열 명도 넘게 평양행을 자처하는 거물급 인사들이 줄을 섰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클린턴을 원했습니다. 그것은 9년 전 이루어질 뻔했던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이 얻고자 했던 것들을 다시 상기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제 NPC 연설에서 북한과 미국 모두 시간을 끌 이유가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북한은 그동안 여러번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지금 북한은 쓸 수 있는 카드를 거의 다 쓴 셈입니다. 김정일은 자꾸 나이가 들어가고 아무리 건강을 회복했다고 하지만 불안할 것입니다. 그리고 2012년은 북한 인민에게 약속한 강성대국 개막의 해입니다. 핵실험을 하고 로켓을 발사했다고 하더라도 인민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나라가 강성대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김정일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바마는 의료보험 개혁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탄력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면 외교정책 추진에도 동력을 잃을 것입니다. 한편, 내치에서 어려우면 외치에 눈을 돌리는 것이 위험을 분산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어떤 길이 되었든 오바마에게 북한 문제는 이란 문제와 함께 외면할 수 없는 당면 과제입니다. 오바마는 김정일이 과연 되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할 것입니다. 김정일은 오바마가 과연 되돌이킬 수 없는 관계 정상화를 할 수 있을 것인지 역시 의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추진해온 “비핵화를 통한 관계 정상화”에다가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를 동시 병행으로 추진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지도자들의 결단이 갖는 의미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1972년 닉슨은 모택동을 만납니다. 중국은 개혁 개방의 길로 나옵니다. 아시아에는 세 개의 공산주의 국가가 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 북한입니다. 이 가운데 중국과 베트남은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 경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오바마와 김정일의 결단 - “OK 목장”의 결단 - 으로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한 국교수립이 교환될 수 있다면, 북한 역시 아시아 공산국가 가운데 마지막으로 시장 경제와 개혁 개방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새벽 6시입니다. 아직 바깥은 밝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구가 자전을 해서 곧 아침이 열려 오듯이, 한반도에도 지금은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조만간 거대한 판의 변화가 다가오고 있음을 저는 온몸으로 느낍니다. 문제는 한국과 한국인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일어서서 주전선수로 나서야 합니다. 2005년 9.19를 기획하고 추진했듯이 한반도의 냉전 해체를 향해 우리가 뒤에서 밀고 앞에서 이끌어야 합니다. 판을 읽어야 합니다. 9월 26일부터 금강산에서 만나기로 한 남북 이산가족 100명의 명단이 확정되었습니다.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 1만6천명의 이산가족이 서로 만난 것을 비교하면 답답해집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후 대한 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직계가족 등록수가 12만명이 넘습니다. 그 숫자가 8만 5천명으로 줄었습니다. 몇 년 가지 않아 이 숫자는 다시 절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지금 새로운 역사를 향한 기회의 문이 열리기 직전입니다. 그 문이 좀 더 널찍하게 열릴 수 있도록 한국과 한국인이 일어서서 그 문을 밀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오래 꿈꾸어온 염원입니다.
이제 워싱턴에 아침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내일 서울로 돌아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정동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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