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잠깐 외출했다. 시내 YMCA에서 열린 광주 민주가족 신년 사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는 5.18 유족들과 부상자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 200여명이 합동 세배를 나눈 자리였다. 그 분들은 광주 민심의 한복판에 있는 분들이다. 그분들의 눈에서 80년 5월과 87년 6월의 희생과 열정이 한낱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지 않는가에 대한 두려움이 역력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분들과의 만남이 끝난 후 자리에서 나와 나주 남평 가톨릭대학 안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계신 윤공희 전 대주교님을 찾아뵈었다.
병풍처럼 두른 산과 넓은 들판, 그리고 맑은 강물이 흐르는 보기 좋은 곳에 유명한 건축가 김원 선생이 설계한 가톨릭 대학 건물은 아름다웠다. 건물만큼이나 조용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윤공회 대주교님은 나와 집사람을 따뜻하게 맞이 해주셨다.
남포에서 6.25 전쟁 때 피난하면서 남으로 내려오신 대주교님은 생전에 남포와 13년간이 신학교 생활을 했던 원산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80년 5월 광주 항쟁 때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던 대주교님은 연세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제가 꼭 대주교님 모시고 남포랑 원산에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인사하자 대주교님은 말없이 환하게 웃으셨다. 고향을 잃은 사람의 한을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까지는 다 알 수 없는 것이 맞다. 내가 어떠한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분의 가슴 속 전부를 위로할 순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주교님 같은 분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주교님을 찾아뵙고 사랑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광주 정통들이 마련한 기타를 받아서 들고 돌아왔다. 가족들 모두가 환호성이다. 원래 기타가 사랑의 집에 있었는데 녹이 슬고 망가져서 못쓰게 되었다고 한다. 첫날 밤 여흥 시간에 내가 “기타를 구해 주겠다”라고 말했던 약속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두 다리를 못 쓰고 눈이 보이지 않는 김인자씨는 내가 기타를 전해 주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마치 오래된 애인을 만난 것 같다. 조용히 기타줄을 조율하고 능숙한 솜씨로 기타를 쳤다.
미카엘이 기타소리를 듣자 신라의 달밤을 엉터리 가사에 엉터리 박자로 불렀고 기쁨조 홍도마는 아리랑과 동백아가씨를 훌륭하게 불렀다. 노래 경연대회가 시작된 것이다.
제일 막내, 스무살인 시몬이 해바라기라는 노래를 불렀다. 듣다보니 가사와 곡이 너무 좋았다. ‘노랗게 해를 닮은 꽃... 해바라기처럼 살고 싶어라. 해바라기 맘으로 살고 싶어라’
정신지체와 언어 장애로 똑 부러지게는 말을 못하지만 그들의 웃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수녀님들도 노래를 불렀다. 안젤라 수녀님은 ‘돌아와도 부산항에’, 젤뚜르다 수녀님은 ‘사랑으로’를 합창했다. 그분들의 모습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수녀님들은 화장품도 사지 않는다.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옷가지도 사지 않는다. 까만 수녀복만 있기 때문이다. 발령이 나면 수녀원에서 헌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새로운 임지로 옮겨간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분들의 삶이야말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삶이다. 두 분 수녀님은 이곳에서 17명의 정신장애자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있었다.
시몬이 문득 내게 언제 가냐고 물었다. “내가 가면 좋은가, 안 가면 좋은가”라고 묻자 가지 말아달라고 답한다. 그 몇 일새 정이 들었나보다.
식구들에게 좋은 선물이 생겼다. 그것은 수녀원 본부에서 안젤라,젤뚜르다 두 수녀님이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도록 계속 근무 하도록 결정을 한 것이다. 만일 수녀님이 다른 곳으로 갔다면 식구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밤이 깊어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하늘에는 빛나는 별이 보인다. 그 누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했던가?
‘머리 위에는 밤하늘의 빛나는 별, 내 가슴속에는 차디찬 도덕률’ 이것은 칸트의 말이다.... 사랑의 집에서 보낸 며칠, ‘내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많이 느끼고 은혜를 받은 시간들이었다’라는 생각을 하며 사랑의 집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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