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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화려한 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입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나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그리고 죄책감…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그 사람들이 살아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도 없는데,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어떻게 해보겠다고 싸우는 모습들에 죄의식을 많이 느낍니다. 그토록 참혹했던 상황을 그렇게 아름답고, 비극적으로 그려놓으니까 더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1980년 5월, 당시 저는 기자였습니다. 광주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광주로 가지 않는다면 제 양심이 허락지 않고,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광주로 갔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다녔지만 그래도 양심에 부끄럽지 않았기에 오히려 마음만은 편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군사 쿠데타 세력의 잔인함과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억울함, 그리고 민주화를 향한 간절한 염원과 열사들의 희생까지, 있는 그대로를 온 국민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내려가서 광주의 진실을 담은 저의 ‘5.18 광주 리포트’ 역시 끝내 방송으로 보도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더 아프게 짓누릅니다. 다행히 지난 5월 이 ‘보도되지 못한 리포트’의 음성 파일이 발견되었습니다. 음질도 떨어지고, 영상도 없지만 당시의 생생한 육성으로 뒤늦게나마 많은 네티즌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을 큰 위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간인 5월 27일 새벽. 저는 도청인근 전남여고 앞 갑을장 여관이란 곳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가 그때 여관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총소리를 듣고 있을 때 죽어갔던 수많은 광주 시민들 생각났습니다. 그 미안함과 죄책감에 흘러나오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 내가 용기가 없었구나, 다른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많이 반성했습니다. 제가 지금 살아남아서 정치를 하고 있지만,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희생한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생각할 때, 과연 제가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장면, 여주인공 신애의 대사처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그 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고, 그 처절했던 순간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화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많이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너도나도 다 자신들이 민주화세력이라고, 미래세력이라고 떠들어댑니다. 심지어 한나라당도 자신들이 민주세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민주세력인지, 진짜 미래세력인지는 시험지의 답안을 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미래세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진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미래민주세력은 과거독재세력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최소한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진정으로 광주시민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광주시민의 아픔 속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이 상황을 넘어서고 극복할  때, 그때야 비로소 광주에서 죽어 가신 분들에게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1980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1980년 광주의 정신이 우리의 역사 속에 파묻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1980년 5월, 고통속의 광주는 2007년 이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아직은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민주세력이 나라를 일으켜 세운지 겨우 10년입니다. 그 10년도 불완전한 10년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광주에서 민주화를 위해 희생되신 분들에게 빚을 갚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의 힘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여기 없을 것이고, 또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고 있는 한 우리에겐 아직 가능성이 있습니다. 슬프도록 처절했던 그 ‘화려한 휴가’를 잊지 맙시다. 광주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희생에 대한 결실을 맺도록 앞으로 더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