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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미국으로 가기전 정동영의 마지막 인터뷰 "내 잘못이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2일 미국으로 떠났다. 대선과 총선의 잇단 참패로 치명상을 입은 이의 환송회는 초라하지 않았다. 정치인과 문화예술인, 종교인까지 300여명의 지인들이 인천공항으로 달려와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난 5월, 경북 문경의 사찰에서 마련한 수련 프로그램에 참가한 후 대체의학인 팔상의학에 심취해 채식으로 식생활도 바꿨다는 그는 선거때보다 훨씬 평화로운 표정으로 환송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한 지인은 “취임 석달 만에 초등학생까지 퇴진을 요구하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아직도 버스비가 70원인줄 아는 정몽준 의원에게 어이없이 졌으니 얼굴은 멀쩡해도 속이 까맣게 탔을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까지만해도 화려한 경력으로 정계의 행운아, 노 정권의 황태자로 불리던 그는 17대 대선의 주요 경쟁자들이 모두 금배지라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만 떨어지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또 열린우리당 시절 현역의원만 60~70명에 달해 최대계파를 형성했던 ‘정동영(DY)계’가 이번 총선의 공천과 선거 과정에서 대부분 탈락한 아픔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는 왜 지금 미국에 가고 언제 돌아오려는 걸까. ‘묵언수행’을 하듯 침묵만 지키던 정동영 전 장관이 떠나기 전날인 1일, 입을 열었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오해의 근원이니 변명이 아니라 오해라도 풀라는 제안에 그는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BBK에 매몰됐던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지난 13년간 정치하면서 후보로 선거 나온 게 9번, 당 의장으로 선거 치른 게 2번 등 총 11번의 선거를 치렀습니다. 진이 빠질 만하죠. 이제 기도 보충하고 잃어버린 감각도 찾아아죠. 우선은 노스캐롤라이나의 듀크대학에 초청교수 자격으로 6개월간 머물다 중국 칭화대로 갈 겁니다. 4월 총선이 끝난 후부터 갈 곳을 알아봤는데 듀크대로 결정한 후에 하버드대학에서 뒤늦게 연락이 왔어요. 듀크대에는 세계적으로 유수한 공공정책 및 환경정책연구소가 있어 공부도 하고 전문가들과도 만날 예정입니다. 또 미국인들이 왜 민주당 대선후보 오바마의 ‘변화’(Change) 구호에 열광하는지 한 번 지켜보고 미 전당대회에도 가볼 생각입니다. 틈나는 대로 몽골, 연해주, 필리핀, 인도 등 아시아권과 중남미의 제3세계 국가들도 방문하고 싶고요. 하지만 거창한 계획을 내세우기보다 그저 물 흐르는대로 살렵니다.”

교수들도 10년마다 안식년을 가지니 정치생활 13년에 기충전을 위한 미국행은 명분이 있다. 하지만 이번 미국행도 쉽지만은 않았다. “더욱 근신하는 자세를 보여야지 무슨 미국이냐. 광우병 쇠고기 먹으러 가냐”는 시비부터 “당의 성격과 운명이 결정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혼자 떠나면 어떡하냐”는 당원들의 불만도 있었다. 총선 때문에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사한 지 석달 만에 또 이삿짐을 싸야 했고 서둘러 사무실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를 따르던 동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두 번의 선거패배로 탈진했고 내상을 입은 그에게 ‘지난 선거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뭐냐’는 잔인한 질문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모 신문은 ‘강아지가 출마해도 당선될 것’이란 기사를 쓰기도 했고 이명박 후보를 떨어뜨릴 가장 큰 무기는 BBK나 다른 비리가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MB지지란 우스갯소리까지 나온 상황에서 정치평론가들도 그의 패인에 대한 분석을 많이 내놓았다. 노무현 대통령 응징론은 물론 정치공학에 너무 함몰되어 대중적 언어로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 범여권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 등등 누가 봐도 공감할 분석들이다. 특히 정치에 아무 관심없는 이들조차 “정동영은 왜 이명박 욕만 하냐”고 반감을 느낄 만큼 반이명박론을 강조해 허경영 후보의 정책보다 그의 정책이 덜 알려졌다는 빈축도 샀다. 그는 “BBK에 너무 매몰됐던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진 바둑을 복기해보면 수십 군데의 패착이 나옵니다. 그걸 왜 피하지 못했나, 이렇게 둘 걸 그랬다 등등 그땐 안 보이던 것이 지금은 환히 보이거든요. 대선에선 BBK에 관해 너무 매몰됐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던 것 같아요. 정치적 논리에 매몰되고 검찰 발표에 흥분되어 냉정을 잃었습니다. 국민들의 70%가 BBK 의혹에 공감한다는 여론조사결과도 나왔고 광운대 동영상이나 이장춘 대사의 명함 등 증거도 많으니 국민들이 분명히 이 후보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요. 한 달 정도 BBK 문제를 이슈화해서 지지율의 변화가 크지 않았으면 다른 이슈로 변화를 주거나 정책차별화를 강조해야 했습니다. 지더라도 남기는 선거가 되었어야 하는데 저의 비전과 정책을 남기지 못했어요. 또 제가 당내 경선은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대선은 시간, 사람이 부족했지요.”

정동영 후보는 곳곳에서 드러나는 BBK 관련 제보들에 흥분했지만 정작 국민들은 BBK인지, BBQ인지 구분하지도 못했고 복잡한 금융회사의 얽히고 설킨 문제들을 언론사 기자들조차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주지 못해 핵폭탄인줄 알았던 BBK는 오발탄으로 끝났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그는 상대당으로부터 ‘퇴짜의 달인’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명박대세론이 굳어지고 대통합민주신당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하지 않자 그는 고건 전 총리,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비롯한 신선한 이미지의 ‘어르신’들을 모셔오려 했으나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민주당 이인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게 단일화를 제안했으나 퇴짜를 맞았고 권력분점을 전제로 한 공동정부 구성을 제안했지만 ‘정략적 카드’란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22번이나 위장전입을 한 데다 자녀까지 위장취업을 한 이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단일화를 이루려고 했으나 ‘정동영 후보부터 속죄하고 물러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결국 국민들에게 호된 퇴짜를 맞았다. 그때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 그는 대통령이 되었을까.

“누가 단일화의 주인공이 되었더라도 거대한 흐름을 바꾸기 어려웠을 겁니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아니라도 10년쯤 지나면 강산이 변할 시간인데 다른 쪽으로 움직이고 싶어지려는 욕구가 있는 데다 노무현 정부가 실수와 실언도 많았고 민생을 못 챙긴 것, 지금도 뼈저리게 반성합니다. 하지만 마치 제가 정권에 눈이 멀어 영혼이라도 팔듯 매도하는 것은 좀 억울한 면이 있죠.”

정치의 본질은 억울하게 만드는 것

정동영 전 장관은 장점이 참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장점이 모두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측근들에게 “난 정동영처럼 잘 생기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좋지 않고 말도 잘 못하는데 어떡하냐”고 열등감을 호소했다. 김근태 전 장관도 “난 카메라 앞에만 서면 뻣뻣하게 굳는데 정동영은 카메라 앞에서 더욱 꽃처럼 화려하게 빛난다”며 부러워했다. 말주변 없는 정치인들은 화려한 제스처에 달변인 그의 격정적 연설에 기가 죽는다. 한 언론인은 깨끗한 용모와 세련미, 정확하고 설득력있는 화법, 내면이 따스할 것 같은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모양이 예쁜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의 근사한 외모와 세련된 화법은 콘텐츠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화려한 언변은 ‘깊이가 없는 가벼운 정치인’ ‘말만 번드르르하게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혼신의 힘으로 연기를 해도 얼굴만 보이는 장동건의 미남 콤플렉스와 비슷하다. 대학생 때부터 학업은 부업이고 본업이 어머니를 도와 아동복을 바느질해 파는 것일 정도로 생활고를 겪었지만 너무 부티나게 생겨 서민심정을 몰라볼 것 같은 점도 약점이다.

남성심리전문가이며 정신과전문의인 정혜신씨는 정치인 정동영을 ‘지나치리만큼 인간적 겸손이 몸에 밴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공항에서 우연히 그를 배웅나온 젊은 보좌관에게도 고개숙여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단다. 그는 첫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고도 “기쁨보다 어깨가 무겁고, 과연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선거였다. 항상 물러날 때를 생각하는 자세로 의정활동에 임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최연소 최고위원에 당선돼 대권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도 “거론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아마추어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는 답을 했다. 겸손만큼 귀한 미덕은 없지만 겸손은 때론 권력의지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지난 경선 때 손학규, 이해찬 등의 후보를 “저보다 몇 배나 더 훌륭한 분들”이라고 소개해 “그 사람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데 왜 나왔느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게다가 그토록 겸손한 자세를 보여주던 사람이 정풍운동이란 명분이 있었지만 선배인 권노갑 의원에게 직격탄을 날리거나 ‘노인들은 투표장에 안나와도 된다’는 등의 발언을 했을 때 사람들의 실망과 배신감은 더욱 커진다.

정동영 전 장관은 다른 정치인들의 감정을 감추는 포커페이스와 달리 본심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다. 기쁠 때는 활짝 웃고 곤란할 때는 면구스러운 듯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 면은 일반인들에게는 호감을 주지만 정치인일 경우 약점이 된다. 그의 표정만 보고도 자신을 싫어하는지 경멸하는지를 알아챌 수 있으니 아무에게나 “우리는 동지”라고 껴안아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엄청난 단점이다. 또 그와 관련한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몹시 피곤해 보인다”는 표현을 한다. 살인적 스케줄 때문에 피로하기도 하겠지만 평상시에도, 또 별로 허약체질이 아닌데도 늘 피곤해 보인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그의 과거 정치인생 중 가장 화려하고 주목받던 통일부 장관 시절에도 그는 피곤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나중에야 그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옷을 입어서, 즉 이상이 다른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그의 황태자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고뇌가 표정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잠시, 혹은 얕게 아는 이들에게 그는 ‘모든 것을 다 갖고도 항상 불만이고 작은 일에도 쉽게 피로해지는 약체’로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여의도 껍질 깨야 ‘변화’ 읽지 않겠나, 그래서 떠난다”

‘대통령의 성격 유형과 리더십 스타일에 관한 연구’란 논문을 쓴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종석 박사는 “물러날 때 깔끔한 것이 정동영의 장점”이라고 평한다. 2001년 11월 민주당 정풍운동 과정에서 최고위원직을 사퇴했고, 2004년 노인폄훼 발언으로 비난여론이 들끓자 비례대표 후보직,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사퇴했다. 

정동영 전 장관은 여의도를 잠시 떠나 정치생활 13년 동안 잃어버렸던 신선한 감성을 찾아 통찰력 있는 지도자로 거듭나고 싶다고 말했다.|서성일기자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하자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당의장에서 물러났다. 유난히 깔끔하게 물러나면서도 또 비난에 시달린다. 이번 총선에서 그는 조금만 비굴하거나 뻔뻔했으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계파의원들에게도 배지를 나눠줄 수 있었다. 비례대표를 주장할 수도 있었고 고향인 전주에서 출마했거나 초기에 거론된 관악구에만 나갔어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는 “대의의 정치를 위해 서울지역에 출마하라” “쉬운 관악이 아니라 어려운 강남에 가라” 등 각종 주문이 쏟아지자 아예 백지위임을 해버리고 동작을에 출마했다가 정몽준이란 강적을 만나 또 패했다. 장점이 약점이 되고, 가만있어도 ‘비굴하다’ ‘죽으려면 확실히 죽어라’ 등의 비난을 들을 때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또 경선 당시 30년 우정의 이해찬, 최초의 여성총리 임명에 힘을 실어줬던 한명숙 후보로부터도 ‘노무현의 황태자이자 가장 큰 수혜자’ ‘노무현과 각을 세우는 배은망덕한 사람’ 등의 비난을 받았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정치의 본질이자 속성이 사람을 억울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려니 해야죠. 누가 도드라지면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더 압박을 심하게 해서 납작하게 만들기도 하죠. 오해와 편견에 시달릴 때 도전적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있고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후자입니다. 내가 아니면 그만이라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권투경기에서도 자꾸 상대의 펀치를 맞으면 방어만 하는 스타일을 바꿔 터프하게, 공격을 해야 하는데 제가 단호함과 적극성이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저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나 음해에는 단호하게 대처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여의도 껍질을 벗고 싶었다

자신이 맡을 뻔한 배역을 상대방이 엉터리로 연기하는 것을 바라보는 배우의 심정이랄까. 정동영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가 열심히 잘해줘서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길 바란다”면서도 “나의 실패가 나만의 실패가 아닌 것 같아 국민들께 죄송하다”란 말을 했다.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던 그가 전 통일부 장관답게 현 정부의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유독 말이 많았다.

“한반도 정세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우리가 구경꾼처럼 전락해 안타깝습니다. 남북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국익에 대단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것인데 걱정이 큽니다. 북측이 냉각탑을 폭파한 것은 북핵 폐기 입구에 들어선 것인데, 이제 출구까지 어떻게 최단시간 내로 갈 것인지 우리가 적극 개입해야 하거든요. 냉각탑 폭파까지 이끌어낸 것은 굉장히 의미있는 결과이지만 우리들의 주체적 노력은 빠져 있어서 회의적 입장입니다. 그리고 북핵 문제는 물론 한반도문제에 대해 새 정부의 그림이 안보여요. 그림이 있어야 전략을 짜죠. 앞으로 2, 3년 내에 한반도에 큰 지각변동이 올 겁니다. 북·미관 계의 대전환은 물론 북·중이나 북·일관계도 급물살을 탈 겁니다. 새 정부의 목표가 북한과 멀어지는 것이 목표라면 상관 없지만 그런 전략이 아니라면 우리 운명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핵문제에 우리 그림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북한문제는 민족문제면서 우리 경제와 연관된 삶의 문제예요. 한국경제가 도약하려면 대륙으로 가야 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통해 대륙으로 가는 길이 보이는데 왜 그 길로 가지 않고 과거로 가려는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는 창의의 시대이고 없던 길도 만들어야 하는데 빠르고 편한 길을 만들어야지 왜 그걸 다시 닫으려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그에게 선거패배 원인 중의 하나가 국민들이 ‘지난 10년간 정부가 북한에 우리가 낸 세금을 퍼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더니 그것도 오해라고 했다. 언제 핵을 터뜨릴지 모르는 김정일, 굶주림에 시달리는 우리 동포들에게 1인당 한 달에 2000원 정도의 분담금, 그것도 일본, 미국도 함께 내는 돈을 내서 평화를 유지하고 동포들의 기아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일임을 강조했다.

“지금 생각해도 제가 대통령선거 때 내놓은 정책들은 유효하고 옳았다고 확신합니다. 한반도 5대철도 활성화 공약은 그것이 지형상 한국의 성장원동력이라고 믿습니다. 좁은 땅 안에서 운하를 팔 것이 아니라 멀리 우주로 나가자거나, 중소기업과 통하는 중통령이 되겠다는 주장, 그리고 지역탕평, 인재탕평, 정책탕평 등 통합의 정부를 만들겠다는 제 주장이 젊은이들에게 꿈을 줄 거라고 믿었지만 국민들은 귀를 닫아 진의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 제 책임입니다. 모두 제 탓이죠. 처음 정치에 입문했을 때는 18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며 현장감각과 민의를 뚫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3년간 여의도 정치에 너무 함몰되어 현장 감각도 둔화되고 대중들에게 마음을 쉽게 전달하는 능력도 잃어버린 것 같아요. 미국으로 떠날 결심을 한 것도 여의도 안에 갇혀서는 어려움을 뚫고 갈 힘이 없을 것 같아섭니다. 촛불로 상징되는 국민들의 다양성, 변화된 욕구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여의도라는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게 필요했어요. 그동안 쉬면서 문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늘 시대정신과 시대요구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들과 만나 위안도 받고 희망도 발견했어요. 물질주의, 성장주의와 대치되는 문화·평화·생태주의에 대한 화두를 얻었습니다. 감성을 바탕으로 한 창조력과 통찰력을 키우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오바마의 변화를 배우고 싶다는 그에게 한 지인은 ‘레이건의 친화력과 화법’을 배울 것을 권했단다. 자신을 낮춰 국민을 편하게 대하고, 가장 쉽고 재미있는 말로 진심을 전달하는 능력 말이다. 여전히 그의 말이 정치적 언어이고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가 되려면 탁월한 능력이 있거나 지극히 어려운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게 공식이다. 누구나 공감할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너무 순탄한 길을 걸은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이번 선거의 패배는 독이 아니라 약, 상처가 아니라 훈장일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손학규 전 대표 등 시련을 겪을 때 초라하게 해외로 떠나 영광을 찾은 선배들은 많다. 

또 정동영 전 장관은 이명박 대통령과는 띠동갑, 12년 연하의 젊은 나이다. 게다가 다른 선배들이 혼자 떠난 것과 달리 정 전 장관보다 대중적 인기가 높고 가장 훌륭한 조언자인 부인 민혜경씨와 동행한다. 민혜경씨는 그가 당직을 사퇴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 결혼 25주년 선물로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란 시를 암송해 주었단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봄길’을 만들러 한여름 꽁꽁 얼어붙은 가슴을 안고 미국으로 떠난 정동영 전 장관. 국민과 소통하지 못해 한여름에도 전국민이 켜든 촛불에 땀흘리는 이명박 대통령. 누구의 심정이 더 답 답할까…. 


▶정동영은 누구인가
앵커출신 96년 정치입문 화려한 경력
부인 납치극 자타 공인 로맨티스트

1953년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사학과 재학 중 유신반대 첫 학생시위에 참가했고 74년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군에 강제징집됐다. 78년 문화방송 입사 후 뉴스앵커와 LA특파원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려 아직도 앵커 이미지가 남아있다. 귀공자풍의 외모와 달리 달동네에 살며 아동복을 만들어 팔던 홀어머니를 도와 동생 3명을 키워냈다.

9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 전국 최다득표를 자랑하며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 당에서도 따돌림당하던 노무현 후보와 끝까지 완주해 ‘꼴찌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이후 열린우리당 의장, 통일부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등 요직을 맡아 화려한 정치경력을 쌓았으나 오히려 그런 전력이 이번 대선 실패의 요인이 됐다.

가냘픈 외모와 달리 정치적 파괴력이 강하다, 순발력이 뛰어나다, 이상적이며 울림이 강한 정치인이다 등의 호평만이 아니라 너무 깔끔한 처세로 스킨십이 부족하다, 왠지 얄미워보인다 등의 지적도 받는다. 술과 노래 등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기자시절에도 술자리에서 일찍 사라져 지금까지 동기들에게 욕을 먹는다. 처가에서 반대하자 설악산으로 납치할 만큼 열렬한 연애를 한 부인 민혜경씨는 25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들 장가까지 보낸 헌신적 내조로 유명하다. 욱진, 정현 두 아들은 현재 육군, 해병대에서 각각 군복무 중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로맨티스트인 그는 최근 디지털카메라에 취미를 붙여 미국에 머물며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감각을 키우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