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EU FTA가 한나라당 단독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으로도, 어떤 변명으로도 비준처리에 따른 중소자영업자들과 농민들의 피멍든 가슴을 달래지 못할 것입니다. 정치란 국민의 아픔을 함께 하고 눈물을 닦아주는 소명인데, 또한번 정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한․EU FTA는 명백한 불평등협상입니다. 유럽연합은 학교 급식에 자국 농산물을 우선 구매할 수 있으나, 우리는 정부조달 학교급식에서 국산 농산물을 우선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습니다. 친환경우리 농산물 무상급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연합 일부 회원국의 경우 영세상인 보호조치를 예외규정으로 뒀지만 한국 쪽에는 인정하지 않고 소매업을 전면 개방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불평등협상입니다.
<5월3일 국회 본청앞 계단에서 열린 한-EU FTA 국회비준 반대를 위한 긴급 기자회견>
한․EU FTA에 따른 정부의 피해대책이라는 것도 실효가 없는 거짓입니다. 국가 간 체결한 조약에 관한 협약인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비엔나 협약)' 26조와 27조는 각각 “유효한 모든 조약은 그 당사국을 구속하며 또한 당사국에 의하여 성실하게 이행되어야 한다“,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아니 된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중소유통상인들을 위한 유통법, 상생법이 휴지조각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4.27재보궐선거를 통해 국민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심판했습니다. 그러나 투표용지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정부와 한나라당은 반서민협상인 한․EU FTA비준안을 단독으로 처리해버렸습니다. 심판에 대한 반성없는 정권은 더 큰 심판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난 4월 13일 야4당과 시민사회단체는 이처럼 실패한 협상인 한․EU FTA의 전면적 재검토와 재협상을 요구하며 이러한 절차를 무시하는 비준에는 반대한다고 합의하였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약속을 했습니까! 한나라당은 '한-EU FTA를 비준하는' 게 국익이고, 민주당은 '비준을 저지하는' 게 국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당의 국익은 재벌대기업을 위한 국익이고, 민주당의 국익은 재벌대기업의 폭식과 횡포로부터 고통받는 서민들(중산층, 자영업자, 농민)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EU FTA, 한미FTA는 재벌대기업의 이익과 서민의 이익이 가장 첨예하게 엇갈리고 대립하는 사안입니다.
4.27 재보선에서 국민들이 출근을 미루고, 퇴근길을 재촉하며 투표장에 달려와 집권여당 후보를 참패시키고, 야권연합 후보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틀렸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표로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우왕좌왕했습니다. 결국 서민에겐 고통을, 야권에겐 불신을 주고 말았습니다. 유럽이나 의원내각제 하에서 이런 식으로 하면 바로 연정이 깨지고, 내각은 실각되면서 선거를 다시 해야 할만큼 중대한 사안입니다. 너무나 뼈아픈 교훈입니다.
최고위원회 뿐 아니라 협상단에 참여한 동료의원들에게 4.13 야권정책연합 합의문을 상기시키며 합의의 방향을 바꾸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결국 너무나 급하게 비준동의로 합의안이 만들어졌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물론 야당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들더라도 타협해서 가야할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당의 명운을 걸고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한미FTA, 한-EU FTA가 그런 사안들입니다. 이것은 당이 국민들에게 제시한 비전과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EU FTA 비준 합의는 작년 전당대회에서 복지와 연합정치를 당의 핵심 노선으로 채택한 당원들에 대한 배반이기도 합니다. 복지와 연합정치 추진에 가장 독이 되고, 족쇄가 되는 게 바로 독소조항 투성이 한미FTA, 불평등조항 투성이 한-EU FTA이기 때문입니다.
<5월4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중인 민노당 의원들을 격려방문한 정동영 최고위원>
지난 3일 야4당 의원들과 시민사회단체가 국회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당 지도부의 1인으로서 이번 사태에 대해 정중히 사과드리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한․EU FTA 비준안을 한나라당과 나란히 손잡고 통과시키는 모습은 피했지만,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과 야당에 다시 한번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당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EU FTA처리과정은 민주당이 한나라당과의 FTA연대로 시장만능 신자유주의국가로 갈 것인가, 아니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담대한 진보의 길로 갈 것인가에 대한 바로미터였습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 정부․여당과의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야권정책연합을 유지한 것은 민주당이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작년 10.3전당대회를 통한 보편적 복지의 당헌 채택, 지난 4월 29일 야3당과 양대 노총과의 노조법 공동발의 합의 등 변화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를 더욱 전면화하고 공고히 해야합니다.
둘째, 야권연합의 핵심이 가치와 비전을 중심으로 한 정책연합임을 다시한번 절감했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나눠먹는 야권연합은 가능하지도, 성공할 수도 없음을 뼈아픈 교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4.13 정책연합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보다 전면적인 정책연합의 내용을 만들어야 합니다. 즉시 정책연합 원탁테이블을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번 한․EU FTA 비준안 통과를 계기로 한미FTA비준동의안도 강행 처리하려 할 것입니다. 수출 중심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서민과 중산층의 희생을 요구하는 한미 FTA에 대해 우리 당은 ‘비준반대, 전면재협상’을 당론으로 재확인하고 야권과의 공동행동으로 반드시 이를 저지해야 합니다. 연합의 관건은 신뢰입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신뢰를 회복해야할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한미 FTA비준 저지는 이를 위한 중요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선거 때마다 표로 보여준 메시지는 아주 간결하고 명확하고 또 일관됩니다. 바로 '오만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않는 정치세력은 어김없이 심판한다'는 사실입니다. 4.27 재보선에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참패한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 민주당이 한나라당을 따라가면, 돌아오는 건 국민의 심판이요 총선·대선에서 참패뿐입니다.
한․EU FTA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한 협상입니다. 결국 머지않아 국민의 고통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정권교체의 문제가 삶의 문제와 직결됨을 또한번 느끼며 무거운 책임감도 함께 느낍니다.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더없이 커집니다. 그 길에 역할을 하겠습니다.
2011년 5월 6일
정 동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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