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동영의 말과 글

역사를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나라는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

고려 말의 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國猶形 史猶魂)’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몸은 4대강 사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우리의 혼은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강바닥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역사의식도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나 집단의 문화는 말과 역사의식에 가장 잘 나타나고, 또 그것들을 통해 보존됩니다. 그래서 우리 말을 갈고 닦는 일이 중요하고, 우리 역사를 올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과 글, 문화가 지금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가 145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변변한 환영식 한번 열지 않았습니다. 기와지붕을 상징물로 내세워 한국 토종호텔을 자임하고 있는 신라호텔에서 한복을 입고 온 고객의 입장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의 상아탑인 KAIST에서는 ‘100% 영어 수업’을 실시하며 철학까지 외국어로 배우는 상황으로 학생들을 몰아넣고 있습니다. KAIST 뿐만 아니라 많은 대학에서 영어강의의 비중을 높여가며, 진리 탐구에 관한 내용과 진지한 사색보다 도구에 불과한 영어 가르치기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할 때 얼마나 영어를 써야 하는지에 관계없이 영어실력으로 사람을 뽑고 승진을 시킵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버리고 외국어를 쓰는 것이 세계화는 아닙니다. 시대적 대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홀대하는 일들이 버젓이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당당해져야   



이러한 문제는 역사 교육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2009년 교육과정 개편에 따라 ‘한국사’는 고등학교에서 선택과목이 되었고, ‘한국근현대사’ 과목은 아예 없어졌습니다.
세계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과목은 거의 선택하지 않고 있으며, 수능에서 ‘한국사’를 선택하는 학생도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미 한국의 역사 수업 비중은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독일 20%, 프랑스 15.5%, 일본 10.1%, 중국 9.4% 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5.4%에 불과합니다.  

과연 한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자라난 후손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영토를 얼마나 잘 지킬 수 있겠습니까? 동해바다에 우뚝 서있는 독도가 왜 우리의 소중한 땅인지,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왜 우리의 위대한 역사인지 그 아이들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이웃 나라의 사람들과 동등하게 교류하며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의 역사 교육은 무서울 정도로 철저합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교과서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선택과목인 일본사는 사실상 모든 학교에서 필수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지자체까지 앞장서서 ‘일본사 필수’를 외치고 있습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동시에 철저하게 자국의 근현대사 교육을 강조하며 대학입시에까지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1년 장쩌민 주석이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대학생까지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까지 쉬지 않고 중국 근현대사를 교육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린 이래 청소년들뿐 만 아니라 당 간부들까지 역사와 지리 공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편협하고 국수주의적인 역사의식을 갖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와 진실, 그리고 정체성을 지키고 당당해지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민족이 당당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당당하지 않고서는 이웃 나라와 대등하게 평화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웃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인정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평화롭게 번영해 나갈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당당한 우리’와 ‘평화롭게 함께 번영하는 이웃’을 동시에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정글 자본주의식 무한경쟁 논리로는 문화 민족, 문화 강국 될 수 없어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시대 우리의 혼을 죽이기 위한 ‘민족 말살 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온 우리의 말과 글입니다. 그렇게 당당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앞장서서 홀대하며 위협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대학입시에서국사를 영어로 테스트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면 한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총리의 발언은 대통령의 역사의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당선자 시절부터 이명박 대통령이 강조한 것이 바로 “초등학교 때부터 국사와 국어까지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와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라며 정글 자본주의식 무한 경쟁 논리를 역사와 교육, 그리고 문화에 주입한 결과, 우리의 국가 경쟁력은 오히려 크게 떨어졌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08년 13등, 2009년 19등, 2010년 22등으로 계속 낮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국어와 국사까지 영어로 가르치고, 수업비중의 단 5%만 역사에 할애하는 나라가 자신들의 뿌리와 정신을 과연 얼마나 잘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창조적인 문화와 세계 평화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문화 민족, 문화 강국이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저 광활한 대륙을 달리던 고구려의 역사도, 한민족의 한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아리랑의 선율도, 그리고 그토록 존경하는 김구 선생도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질지 모릅니다.


민족의 흥망성쇠를 가르는 것은 역사의식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역사를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에 나아갈 방향을 예측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뿐 아니라 그 사회의 방향성, 미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역사의식은 바르고 정확해야 합니다.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지도자의 철학과 역사의식에 달려있습니다. 훌륭한 평가와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의 공통점은 그 시대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지나온 역사가 말해 주듯이 지도자의 철학에 따라 거대한 제국이 급격히 쇠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작은 도시국가가 찬란한 역사를 꽃피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중요성은 수천, 수만년의 역사를 거슬러가지 않고 지난 10년 우리의 과거만 돌이켜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연평도 포격사건 때 이 정부는 우리의 영토를 우리 손으로 지키기 위한 노력 보다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데 더 급급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서해 바다에는 미국의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가 깊숙이 들어왔고, 같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불평등 조약인 ‘한미FTA’ 재협상이 이루어졌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국민의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002년 6월, 서해 교전이 일어났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교전 직후 핫라인을 통해 북측에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임을 밝히고 무력도발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이후 북한은 책임자를 문책했다는 내용을 알려왔으며, 북측의 사과를 받고 난 후 남북은 다시 대화국면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우선이었습니다.

독도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2008년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문제와 관련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물론 청와대에서 오보라고 주장했고, 시민들이 소송을 냈다가 대법원에서 기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가 일본 언론을 상대로 강력한 법적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의아한 부분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참여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005년 2월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조례안이 통과됐을 때, 참여정부에서는 이를 ‘제2의 한반도 침탈’로 규정하고 단호하게 대처했습니다. 당시 NSC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던 저는 '대일 신독트린'을 발표하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토권’ 주장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인류 보편적인 가치와 상식에 기초한 한·일관계를 구축해나가면서 철저한 진실규명, 진정한 사과와 반성, 용서와 화해라는 세계사의 보편적 방식에 입각하여 과거사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라는 영토 위에, 역사는 의식 위에 세워지는 것


우리의 영토와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누구의 문제입니까? 다른 누구의 문제도 아닌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프랑스에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이 정부의 모든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도 문제에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남북문제를 우리의 손이 아닌 외세에 맡기려는 ‘비굴한 역사의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정부의 모든 문화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홀대하고, 다른 나라의 눈치만 보고 있는 ‘빈약한 역사의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정부의 모든 교육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화와 국제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우리 아이들을 정글 자본주의식 무한 경쟁 논리로 몰아붙이고 있는 ‘천박한 역사의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긍심을 되찾고 당당해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문화의 힘은 세계무대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 신경숙 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한국 소설 최초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습니다. ‘천년의 종이’라 불리는 한지는 종이, 의류, 가구의 용도를 이미 넘어섰고 세계최초로 ‘한지를 이용한 차량용 스피커’까지 개발되며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무술 태권도와 태껸 등이 결합된 넌버벌 퍼포먼스 ‘점프’는 영국의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이후 이제는 뮤지컬의 본고장인 뉴욕 브로드웨이에까지 진출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혼과 정신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영토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면 역사는 의식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그러한 역사의식을 바로 세워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임기 5년을 바라보고 할 일이 아니라 미래 100년을 내다보고 해야 할 일입니다. 바른 정치란 그러한 역사의식을 토대로 할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진실을 찾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다


역사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고, 동시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올바른 역사의식과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당당해 질 때 우리의 후손들도 더 당당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역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여전히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그 분의 역사의식과 지도자로서의 철학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0년 이상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역사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나의 소원’이 제 개인의 소원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소원이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원인은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2011. 4. 19.  정 동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