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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가짜보다, 가짜를 권하는 사회를 뿌리뽑고 싶습니다.

가짜보다, 가짜를 권하는 사회를 뿌리뽑고 싶습니다. 

 정덕희선생!

오늘 아침 인터넷에서 정선생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최근 신정아씨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학력 위조 파문에서 많이 괴로워하셨더군요. 이지영씨, 김옥랑선생, 심형래감독, 정선생, 그리고 윤석화대표까지 끊임없이 진행되는 학력 고백과 위조 공방을 바라보며 제 마음도 착잡합니다.

진심으로 선생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어쩌면 이미 벌을 받을만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선생 파문을 보면서부터 저는 ‘우리 사회의 학벌, 학력문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와 동갑인 정선생에겐 27살 먹은 아들이 있더군요. 그 아들의 시선으로 엄마의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들에게 정선생은 실력있는 엄마였을 겁니다.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지도 거듭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사람이 어떤 생각과 실적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어디 학교를 나왔느냐는 가장 큰 본질이 아니라는 쪽입니다. 학력 위조는 분명 범죄지만 능력과 노력만으로는 열리지 않는 성공의 문을 따기 위해 남의 열쇠를 훔치는 심정을 이해합니다.

90년대 초 미국 LA 특파원 시절 이 문제에 대한 큰 교훈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다이언 파인스타인, 샌프란시스코 시장을 지낸 이 여성이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도전했습니다. 파인스타인씨를 인터뷰하러 갔는데 자료에 출신학교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칠 때 쯤 어느 학교를 나오셨느냐고 물으니 당당한 어조로 버클리 대학에서 학사를 하고, 아이비리그의 어느 대학에서 석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보다 하고 나오는데 공보비서가 저더러 그러는 겁니다. “당신이 우리 후보를 인터뷰한 150번째 기자인데 학력을 물어본 유일한 기자다, 고맙다”

 저는 정말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나는 학벌과 학력을 따지는 한국에서 온 기자임에 틀림없구나’ 하는 자탄이었습니다. 그 며칠 뒤 주말 9시 뉴스의 특파원 리포트라는 코너를 통해 이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무엇을 했으며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느냐를 따질 뿐 학력과 학벌을 묻지 않는 미국 사회를 보니 부러웠습니다. 우리 사회와 제가 부끄럽습니다”라고 방송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제끼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학교를 나왔느냐, 어디까지 공부를 했느냐로 제끼고, 출신 지역이 어디냐로 제끼고, 남자냐 여자냐로 제끼고, 장애인이라고 제낍니다. 요즘은 이런 제끼는 문화가 많이 퇴색했다지만 아직도 많이 남았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나왔는데 서울대학교 졸업생 내에서도 어느 단과 대학을 나왔느냐로 제끼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런 문화에서는 의대나 법대를 나와야 제낌을 당하지 않습니다.

능력으로,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대결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진짜 선진국입니다. 대운하를 파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4만 달러가 된다고 선진국은 아닙니다.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나라, 열 몇살 때 치른 시험 성적 하나가 평생 인생을 좌우하는게 아니라 그 일에 필요한 능력과 실적을 갖고 있느냐로 평가하는 나라, 꼭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예 이 문제가 쟁점이 된 마당에 혹 아직도 학력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더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하셔서 가짜의 뿌리보다, 가짜를 권하는 사회적 장벽의 뿌리를 뽑는 계기를 같이 만들어나가길 희망합니다.  

오늘부터는 편안한 밤이 되시길 빕니다.  


2007년 8월 15일 늦은 밤에 정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