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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말과 글

권력의 살인납치도 이겨낸 김대중 대통령님, 다시 일어서십시오.

‘김대중 피랍사건’은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전 야당 대통령 후보가 동경 한 복판에서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며, 당시 살아서 생환하신 날이 8월 13일, 바로 36년 전 오늘입니다.

                             <생환 후 자택서 회견하시는 모습. 사진출처 : 김대중 사이버 기념관>

당시 한국은 동토의 공화국이었습니다. 유신통치하에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일체의 표현의 자유가 몰수당해 모두의 귀와 눈, 그리고 입이 꽉 막혀 있었습니다. 온 나라가 자연의 계절과 상관없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엄혹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일어났던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저는 8월 여름날을 안국동에서 보냈습니다. 안국동에 있는 일본 문화원을 다니며 아사히나, 마이니치 등 일본 신문을 늘 살펴보았습니다. 또, 한국의 시내에 깔리는 외국 잡지들은 모두 ‘가위질’을 당했기 때문에 타임지나 뉴스위크 등의 시사 주간지를 챙겨 보고 아직 가위질 되지 않은 기사를 찾아보고, 기사 내용을 베껴서 친구들에게 진상을 알려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9월 학기가 시작되며 삼삼오오 뜻을 같이 하는 학생들이 모이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1973년 10월 2일, 드디어 동토의 공화국에 얼음을 깨트리는 최초의 함성이 일어났습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유신반대 시위가 일어난 것입니다. 약 1,000여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서 교정을 돌며 구호를 제창했습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하라!”


구호를 선창하며 피가 끊는 느낌이었습니다. 모두가 ‘쉬쉬’ 하던 때 함성을 토해내며 시위 현장에서 최초의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얼마 안 있어 수 천명의 경찰이 쏟아져 들어와 학생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저 역시 그 때 경찰들한테 붙잡혀 가며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품을 잃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차고 다니셨던 시계였는데 경찰들한테 붙잡혀서 끌려갈 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움켜쥐려는데 경찰의 군화발에 손이 밟혀 으깨졌습니다.

그대로 남대문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다시 마포 경찰서로 옮겨져 1달간 구류를 살았습니다. 이것이 저의 반독재 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73년 10월 2일에 타오른 ‘유신타도’의 첫 횃불을 계기로 서울 시내 대학들과 전국에 유신타도 시위가 번졌고 74년 4월 3일에는 전국대학생연합 투쟁계획이 사전에 진압되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때 저는 다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결국 강제 징집되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독재를 증오했던 청년시절 정동영이 겪었던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어제 오전에 이희호 여사님을 만나 뵙고 얘기를 나눌 때, 이희호 여사님께서도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지독했던 시절이었는지...”라고 회상하시면서 말문이 막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2007년 '도쿄피랍 생환 34주년 기념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께서 지난 7월 13일 병석에 눕게 되셨는데 8월 13일 다시 의식을 찾고 일어서신다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36년 전 그때처럼 말입니다.

7월 13일은 월요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미국 조지아 대에서 오신 박한식 교수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직전에 평양에 다녀오셨는데 두 여기자 석방 문제와 관련해 민간인으로서 큰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박한식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시길, 원래 13일 오후 5시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뵙기로 했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취소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날 오전까지도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셨습니다. 다음날 있을 한-EU 상공회의소 연설문을 작성해 측근들에게 직접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한식 교수와의 오후 면담 일정을 취소하고, 저녁에 바로 중환자실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병석에 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북문제를 위해 고투하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습니다.

청년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상과 철학, 그 분이 주창한 ‘4대국 보장론, 한반도 평화론’에 열광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남한을 인정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을 인정하고 교차 승인하자는 것이었는데 김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이 되어 ‘4대국 평화 보장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40여년전에 내놓은 한반도 평화론, 그러나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김대중 대통령의 비전.
이것을 계승하는 것이 후배 정치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이러한 철학과 비전에 공감하고 열광했기 때문에 참여정부 때 입각을 권유받았을 당시에도 남북문제를 다루는 통일부장관을 고집했던 것이었습니다. 청년시절 공감한 4대국 보장론과 한반도 냉전 해체에 기여하고 싶은 열망이 컸습니다.

‘거인’ 김대중 대통령께서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가 오기 전에 병석에 눕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평화와 냉전 해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경제, 이 세가지를 그 분의 ‘3대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진보진영의 후배정치인들이 계승하고 완성해야 할 몫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하루 빨리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한번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습니다.